1990년 2월 14일, 인류는 우주로부터 아주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13년간의 장대한 임무를 마치고 태양계를 막 벗어나던 무인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 우리가 사는 고향 행성인 지구를 향해 렌즈를 돌린 것이다.
당시 보이저 1호의 위치는 명왕성의 궤도보다도 훨씬 더 먼 거리였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보이저 1호는 행성들이 도는 평평한 원반(황도면)을 따라 날아간 것이 아니라, 토성 탐사 이후 토성의 중력을 이용해 원반의 위쪽으로 솟구쳐 올라가며 태양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쉽게 비유하자면, 운동장의 트랙을 따라 달리는 선수들(행성들)이 있다면, 보이저 1호는 트랙을 한참 벗어나 관중석 2층쯤에서 운동장 전체를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은 것과 같다.
그렇게 60억 킬로미터(지구-태양 거리의 약 40배)라는, 가늠하기조차 힘든 거리에서 우리 집의 ‘셀카’가 촬영되었다.
사진이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속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푸른 바다와 거대한 대륙의 모습 대신, 광활한 어둠 속 한 줄기 햇살 안에 부유하는 희미한 점 하나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전체 64만 화소 이미지 속에서 지구는 고작 0.12픽셀, 눈을 가늘게 떠야 겨우 보이는 먼지 한 톨에 불과했다.
이 역사적인 사진 한 장이 탄생하기까지는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역할 이 컸다. 그는 태양계를 떠나는 보이저 1호의 카메라를 지구 쪽으로 돌려 사진을 찍자고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 제안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과학적 가치가 없다는 점과, 강렬한 태양빛이 카메라를 손상시킬 수 있다는 기술적 위험 때문에 반대했다.
하지만 칼 세이건은 이 사진이 우주 속에서 우리의 본모습을 볼 수 있는 ‘우주적 거울’이 될 것이라며 설득했다. 결국, 보이저 1호는 카메라를 돌려 태양과 여섯 행성이 담긴 ‘태양계 가족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연히 한 줄기 빛이 정확히 지구를 지나가며, 광활한 우주 속에 지구가 소중히 놓인 듯한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칼 세이건은 이 작은 점에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는 시적인 이름을 붙여주었고, 이 사진은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한 장의 편지가 되었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7/71/PaleBlueDot.jpg/250px-PaleBlueDot.jpg 출처 위키백과
칼 세이건은 이 사진으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아, 인류가 얼마나 겸손해져야 하는지를 역설했다.
그의 말처럼, 우리가 사랑하고 증오했던 모든 사람, 인류의 모든 역사와 문명, 모든 희로애락, 모든 종교와 이념들이 저 햇빛 속 먼지 한 톨 위에서 명멸해 갔다.
수많은 장군과 황제들이 저 작은 점의 한구석을 차지하려 흘렸던 피의 강들은 얼마나 찰나적인 영광을 위한 것이었는가.
이 사진은 인류의 자화상이다. 총알보다 열 배나 빠른 우주선으로도 12년 가까이 날아가야 닿을 수 있는 그 아득한 거리에서 본 우리 존재는 처연할 만큼 외롭다.
저 작은 점 위에서 우리가 벌이는 모든 다툼과 경쟁, 국경선과 이념을 내세우며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증오는, 저 우주적 시선 앞에서는 한 알의 모래 위에서 벌어지는 개미 군단의 싸움처럼 허망함을 느끼게 한다.
기후 변화라는 재앙이 눈앞에 닥쳤음에도, 우리는 마치 서서히 가라앉는 배 위에서 더 좋은 의자를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사람들처럼 자원 경쟁과 경제 전쟁에 몰두한다.
하지만 이 처연함 속에서도 우리는 역설적으로 인류의 위대함을 발견해야만 한다.
저 먼지 같은 점 위에서 태어난 존재가, 스스로의 힘으로 사고하고 탐구하여 60억 킬로미터 밖까지 자신의 눈을 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그 먼 거리에서 우리를 찍은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 그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단순한 먼지가 아니라, 어떤 난관이라도 헤쳐나갈 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한다.
‘창백한 푸른 점’은 우리에게 묻는다. 이토록 외롭고 연약하기에 더없이 소중한 우리의 집을, 그리고 그 안에서 기적처럼 태어난 우리 자신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유리 가가린은 인류 최초로 우주에서 지구를 본 뒤 “지구는 푸른빛이었다”는 짧은 소회를 남겼고, 칼 세이건은 60억 킬로미터 밖에서 본 지구를 ‘창백한 푸른 점’이라 명명했다.
이처럼 멀리서 본 우리의 고향은 작지만 푸르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하지만 그 고요한 푸른빛 이면에는 46억 년이라는 장구한 시간 동안 이어진 격동의 서사가 숨어 있다.
태초에 지구는 태양계 형성 과정에서 남은 잔해들이 뭉쳐 만들어진 불타는 용암 덩어리였다.
수억 년에 걸쳐 식고 굳어지며 육지와 바다가 생겨났고, 수많은 소행성과의 충돌이라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지름 약 12,742km의 이 행성은 텅 빈 무대가 아니었다.
약 38억 년 전, 깊은 바다 어딘가에서 첫 생명의 씨앗이 싹텄다. 이 작은 시작은 실로 위대한 서막이었다.
단세포 생물에서 다세포 생물로, 어류에서 양서류로, 파충류와 포유류로 이어지는 진화의 대장정 속에서 지구는 지금까지 수십억 종에 달하는 생명체를 품었다가 지워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현재도 인류를 포함한 870여 만종의 생명체들이 지구촌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기나긴 서사에서 인류의 등장은 가장 최근의 일이다. 미국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약 30만 년 전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는 지금까지 약 1,170억 명이 지구에 살다 간 것으로 추정된다.
인류는 무리를 짓고 문명을 일구며 지구의 가장 강력한 종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화려한 문명의 발전과 동시에, 피비린내 나는 갈등의 역사이기도 했다.
역사학자 윌 듀랜트(Will Durant)는 그의 저서 『문명 이야기』에서 인류의 기록된 3,400여 년의 역사 중 인류가 온전히 평화를 누린 기간은 300년이 채 안 된다고 분석했다.
또한 '전쟁 백과사전(The Encyclopedia of Wars)'에서는 인류역사에서 일어난 주요 전쟁이 1,736건이라고 한다.
또 다른 연구들에서는 국가 간의 대규모 충돌은 물론 내전, 반란 등 모든 형태의 무력 충돌을 포함했을 때 기록된 전쟁만 해도 1만 4천여 건이 넘는다고 한다.
그 전쟁으로 직접 사망하거나 기아, 질병, 학살 등으로 죽은 생명은 제1, 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만 합쳐도 1억 명에 달하며, 역사 전체를 아우르면 적게는 수억에서 많게는 십억 명은 훌쩍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지구에 살았던 호모사피엔스 전체 약 1,170억 명 중 수많은 인류가 전쟁으로 죽었던 것이다.
우리는 한편으로 경이로운 예술과 철학, 과학을 꽃피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를 죽이고 죽는 비극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수십억 년 동안 푸르고, 사람 살기에 적당한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았었다. 이전의 인류가 벌이는 전쟁과 문명의 흥망성쇠는 거대한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찻잔 속의 태풍과도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불과 200여 년 만에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인류는 지구의 자원을 무섭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숲이 사라지고 강과 바다가 오염되었으며, 대기의 성분마저 바뀌었다.
46억 년을 버텨온 지구는 이제 미열과 컨디션 난조를 보이는 환자처럼 몸살을 앓고 있다.
드디어 인류는 지구를 급사시킬 수 있는 가장 위험한 불장난을 시작했다. 수만 개에 달하는 핵무기는 지구와 인류가 쌓아 올린 모든 서사를 단 한 순간에 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파멸의 단추인 것이다.
공포의 균형이라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매우 불안한 상황에서 서로를 윽박지르고 있다.
60억 킬로미터 밖에서 본 ‘창백한 푸른 점’에는 국경선도, 이념의 차이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유일한 집이 있을 뿐이다.
지구의 서사는 지금 가장 위태로운 마지막 장에 다다랐다. 이제 추상적인 평화의 구호를 넘어, 우리의 유일한 집을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이 절실한 때이다.
이러한 인류 공동의 위기 앞에서, 우선 우리에게는 전 인류를 한 가족으로 묶어줄 새로운 상징이 필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세계 평화와 협력을 위해 국제연합(유엔)을 만들고 그 깃발을 높이 들었다. 하늘색 바탕에 세계 지도와 올리브 가지가 그려진 유엔기는 평화를 향한 인류의 고귀한 이상을 담고 있다.
https://sl.bing.net/er2kSW9yZUa 출처 위키백과
하지만 이 깃발 역시 한계를 가진다. 첫째, 평화라는 ‘개념’을 그림으로 표현한 ‘추상적 상징’이라는 점이다.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구체적인 ‘실체’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둘째, 깃발 속 세계 지도는 여전히 우리가 서로 다른 대륙에 나뉘어 살고 있음을 전제하며, 국경선을 암시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모두가 하나의 운명 공동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하는 계기가 필요하다. 본래 하나인 우리가 왜 분열되었는지를 ‘성찰하게 하는’ 새로운 상징이 필요한 것이다.
‘창백한 푸른 점’ 사진이야말로 이 새로운 시대의 깃발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이 제안은 기존 유엔 깃발을 대체하자는 것이 아니다. 기존 깃발이 인류의 ‘지향점(희망)’을 상징한다면, ‘창백한 푸른 점’ 깃발은 인류의 ‘현실(존재)’을 상징하는 보완적이고 더 근원적인 깃발이 될 것이다. 이 깃발은 다음과 같은 강력한 힘을 지닌다.
우선, 이것은 ‘사실’이다. 누군가의 상상이나 합의가 아닌, 과학이 증명한 우리의 실제 모습이다. 특정 문화나 종교, 이념으로 해석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 깃발에는 경계가 없다. 여기에는 국경선도, 인종의 구분도, 부와 가난의 차이도 없다. 오직 ‘우리 모두(All of us)’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이 깃발은 긍정적 가치를 품고 있다. 평화, 인권, 환경 보호, 상호 존중. 이 사진을 보고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환경 파괴를 옹호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유엔 총회 결의를 통해 ‘창백한 푸른 점’을 유엔의 ‘상징 깃발’로 지정하고, 유엔 본부를 비롯하여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모든 중요한 장소에 이 깃발을 게양하자.
이는 참가자들에게 논의의 궁극적인 목표가 자국의 이익을 넘어 인류 전체의 생존에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특히, 분단된 남북한의 지도자가 만나는 판문점이나 전 세계 분쟁 지역에 이 깃발이 걸린다면, 군사적 대치의 긴장을 완화하고 대화의 본질을 되새기게 하는 효과를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유엔 사무총장의 이름으로, 전 세계 모든 국가의 지도자에게 ‘창백한 푸른 점’ 사진과 칼 세이건의 해설을 담은 최고 품질의 액자를 제작하여 공식적으로 배포하는 것이다.
이 액자는 지도자의 집무실, 가장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바로 그 공간에 걸려야 할 ‘양심의 거울’이다. 지도자들은 매일 아침 집무실에 들어서며 이 사진을 보게 될 것이다.
국익을 위한 외교 전을 앞두고, 그들은 저 작은 점을 바라보며 자신의 결정이 수십억 인류와 미래 세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한 번 더 숙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지도자의 의사결정 과정에 ‘인류애’와 ‘지구적 책임’이라는 변수를 끊임없이 주입하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가 되어줄 것이다.
역사가 E. H.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이는 역사가 박제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다시 쓰이는 살아있는 서사임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역사를 가슴에 새기고, 역사가는 그 시대의 사실들을 모아 펜으로 종이 위에 기록한다. 그렇다면 이 행성, ‘지구의 역사’는 과연 누가, 어떻게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일까?
지구의 역사를 써 내려간 최초의 저자들은 인류가 아니었다. 수억 년에 걸쳐 수많은 생명종들이 자신의 존재를 이 땅 위에 아로새겼다.
삼엽충은 고요한 바다 밑에, 공룡은 거대한 발자국으로, 고대의 숲은 두꺼운 석탄층으로 자신들의 시대를 기록했다. 그것은 경쟁과 생존의 치열함 속에서도 거대한 순리의 흐름을 따르는, 장엄하고 서정적인 역사였다.
하지만 약 3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라는 새로운 저자가 등장하면서 지구 역사의 장르는 뒤바뀌었다. 고요한 서정시는 의지와 욕망이 들끓는 격렬하고 난폭한 활극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한 시대의 역사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얼마나 현명한지에 따라 그 품격이 결정된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의 지혜와 어리석음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현명한 주인공들은 상생과 조화의 서사를 통해 문화를 창달하고 나라를 부흥시키며, 결과적으로 지구가 더욱 풍요로워지는 역사를 썼다.
반대로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주인공들은 갈등과 파멸의 기록을 남겼다. 그들은 작게는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나라를 망하게 했으며, 나아가 지구 전체를 깊은 병으로 신음하게 했다.
바로 지금, 우리 인류는 지구의 역사라는 거대한 책 위에 현재의 역사를 실시간으로 쓰고 있다. 우리가 내딛는 모든 발걸음,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은 곧 과거가 되어 미래 세대의 냉정한 심판대 위에 오를 것이다.
후손들은 우리가 쓴 이 시대의 역사를 보며 과연 우리를 현명했다고 평가할까, 아니면 어리석었다고 평가할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엄숙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미래의 역사는 당연히 우리의 후손들이 쓸 것이다. 그들이 지혜롭고 평화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스스로 현명한 역사를 쓰는 모범을 보여주어야 만한다.
분열과 갈등이 아닌 협력과 공존, 파괴가 아닌 상생의 지혜를 유산으로 남겨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아이들과 손자들이 파멸의 무기가 아닌, 평화와 사랑의 펜을 쥐고 지구의 다음 장을 써 내려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지구의 역사를 쓰는 펜은 지금 지구촌 870여 만종의 생물을 대표해서 우리 인류의 손에 들려 있다. 우리 모두 준엄한 사가(史家)가 되어야 한다
결국 이 모든 제안은 하나의 가치, ‘인류애’로 귀결된다고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지구’라는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라는 ‘동지애’인 것이다.
인류애는 인류가 21세기를 넘어 존속하기 위한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전제 조건일 수 있다.
‘창백한 푸른 점’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이 작고 유일한 집에서 계속 다투며 공멸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모두가 한 가족임을 깨닫고 서로의 손을 잡을 것인가.
이제는 우리가 행동으로 답해야 할 시간이다. 저 창백한 푸른 점의 시민으로서, 그 깃발아래, 분열과 갈등을 넘어 공존과 협력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