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영완
모든 인간은 지구의 생태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지역의 자연에 의존하여 생존 발전하면서 문화적 활동을 영위한다 대부분의 자연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개발되거나 벌채되고 채취 포획 되면서 점점 환경은 오염되고 생태계는 변화하게 된다 인류의 문명이 발생한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황허 등의 지역조차도 과도한 개발로 결과적으로는 인류가 더 이상 머물지 못하는 곳으로 변질되면서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인간의 수가 급진적으로 늘면서 ㅈ다연파괴가 인간의 삶을 위협하게 되고 자연보호를 하자는 운동과 개발계획의 제한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규제하기에 이르렀고 1972년 UN은 스톡홀름에서 하나뿐인 지구(only one earth)’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세계 121개국이 모여 환경보호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럼에도 산업의 증가로 지구가 무차별적으로 개발되고 과도하게 물을 사용하면서 오폐수가 늘어 하천 해양의 오염이 나날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되었다 악화된 수질로 지구 곳곳에는 커다란 변화에 직면하여 자연은 변화하게 되고 그 결과, 다양한 종류의 재앙이 다시 인류를 급습하기에 이르렀다
그냥 흘러갈 일만 남아
잃어버린 시간의 악보를 켜 보았다
강 언저리 달맞이꽃 물에 잠겼다
아플 만큼은 다 아파
떠나간 통증을 멀찌감치 바라보고 누워서
오래 말없이 수상가옥 하나 띄우고
우기의 흰 눈물이듯 흠뻑 젖는 일
해체된 몸은 방사선 통과한 몇 장 흑백필름이 되어
가벼운 벽에 검은 착상이듯 걸렸다가
다시 컬러로 환치되리라
녹색 풍경 비좁은 세상에
차창을 열듯 불현듯 강바람에 머리카락 쓸며 일어서리라
강의 녹색 행보를 그리다 보면
누워 흐를 때보다 빨라
호포나루에 당도하리라
강의 일기는 이렇게 몰래 내가 쓴다
언제든 옷 벗고 뛰어들 수 있는 내 유일한 방편이다
-탁영완, 「강이 아프다」
탁영완 시인의 시 「강이 아프다」이다. 이 시에 나타나는 비언어적 몸짓들은 ‘악보를 켜거나’ ‘통증을 바라보고’ ‘흠뻑 젖고’ ‘일어나는’ 등에서 읽혀진다. 시에서 화자는 다양한 비언어적 행위를 통해 강의 일생을 스케치하듯 메시지를 던진다. 이러한 비언어적 메시지는 개인마다 다르다. 마찬가지로 이 시에서는 강의 아픔을 다양한 형태로 제시한다. 그리고 화자가 진심으로 소통하려는 방식은 강의 몸짓에서 찾게 된다. 이를테면 화자는 언어로 말하는 존재보다는 몸짓으로 표현하고 생각하는 ‘나’ 즉, ‘강’의 아픔을 토로하고 있다.
또 이 시의 화자는 파괴되어 가는 강의 모습과 자신의 상처를 겹쳐 놓았다. 곳곳에 파헤쳐져 있는 아픈 강의 모습에서 자신의 내면에 산재한 슬픔을 재발견한다. 슬픈 현실을 그대로 바라본다는 점은 오히려 긍정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슬픈 현실보다는 만들어진 허구에 더 슬퍼하도록 강요당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구가 주는 슬픔이 아니라 당면한 현실을 슬퍼하는 능력은 살아가면서 매우 중요한 능력으로 이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진실된 자아와 마주하게 되고, 또 슬픈 현실을 극복하는 새로운 힘을 갖게 된다. 슬픔은 흘러간다. 조금씩 조금씩 흐르면서 슬픔은 끝내 사라진다. 슬퍼할 상황 속에서 충분히 슬퍼한다면, 선물처럼 귀한 자신의 삶을 충분히 통찰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건강한 강의 내면에 뛰어들어 영원히 살아 숨쉬는 것처럼, 자신의 삶도 강과 나눈 슬픔으로 다시 건강하게 된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욕망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불행’이라 했고, 그런 그에 따르면 욕망은 결핍에서 온다. 그래서 인간은 욕망과 억압 사이에서 방황하다 불안을 키우기도 하고 이를 극복하기도 한다. 또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욕망은 실체가 있다기보다는 타인의 욕망을 매개로 하며, 이 욕망은 결국 타인의 욕망이 된다고 했다. 어쨌든 그들이 서로 욕망의 근원을 다르게 둔다고 하더라도 시인이 대체로 자기 욕망을 시화하려는 노력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시에 나타나는 욕망은 시인의 내부에서 발생한 자발적인 욕망이기보다는 시의 ‘퍼스나’가 타인의 욕망을 매개로 가지는 타인의 욕망에 더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이러한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에 가깝다고 본다. 그런 줄 알면서도 인간은 매번 자신에게 허락된 감정의 무게에 허우적거리며 살아간다. 때로는 그 열기가 스스로를 태우기도 하고, 또 타인을 태워버리는 경우도 있다. 더러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감정의 망령에 쫓기기도 하고, 그 허상에 매달리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이고, 그래서 시인이다.
위의 시들에서는 비언어적 요소들이 중지된 상태가 아니라 움직이고 있다. 또 이 움직임은 상황에 따라 변화하며, 이를 독자의 시선이 따라가고, 그 과정에서 독자는 읽는 재미를 더하게 된다. 각각 ‘바람, 구름’(강남주), ‘산’(이몽희), ‘암실’(강정화) ‘강’(탁영완) 등은 욕망의 중재매개물로 나타난다. 화자는 이러한 욕망의 매개물과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자신의 욕망이 헛되다는 점을 깨닫는다.
이 경우 지라르의 외연적 간접화가 나타나며, 그것은 주체(화자)와 중재자(매개물) 간의 거리나 교환, 경쟁 등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 시의 화자가 갖는 욕망이 슬프게 와닿는 이유는 화자의 욕망이 대상을 향하여 굴절된 것으로 화자는 이러한 욕망의 구조를 인지하고 자발적으로 그 욕망을 키워나가고 있다는 점에 기인된다.
온전한 성인이라면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한편,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범주 내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려 한다. 자신의 느낌, 판단, 행동, 어느 하나도 소홀하지 않고 주어진 여건 속에서 선택하고 책임지는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자기 행복을 만들어가려는 주도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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