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성적이 안 좋았던 나는 고3 여름방학 때 얼떨결에 논술학원에 다니게 되었고, 얼떨결에 논술 비율이 100%인 대학교에 합격하게 되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이 합격이 실력이 아닌 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운 좋게 붙은 대학의 전공은 불어불문학. 지원 당시 경쟁률이 제일 낮았던 과였다. 그렇게 또 팔자에도 없던 불어를 얼떨결에 배우게 되었다. 사실 문화콘텐츠 쪽이나 일본어가 하고 싶었는데 결국 가능성 있는 쪽에 던지게 되었다.
불어는 정말 어려웠고 그때마다 일본어에 대한 갈망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런데도 내가 일본어과로 전과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일본어과 학생들이 다 타과로 전과를 하고 있어서였다. 가라 앉는 배에 굳이 탑승을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이 너무 커져서 하기 싫은 불어를 꾸역꾸역 했는데 그랬으면 안 됐다는 걸 아직도 후회 중이다.
학교를 다니며 카페 아르바이트,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하고, 여러 나라 여행도 다녀왔다. 그러다 졸업을 했고 친구의 소개로 학원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원 아르바이트를 하며 언제까지 해야 할지 고민하던 와중에 코로나가 터졌고 학원 쪽도 휴원을 하느니 마느니 이런 이야기가 나왔는데, 휴원을 하게 되면 학생, 학부모와의 연락으로 복잡해지는 건 나일 거 같기도 하고 슬슬 취업 준비를 해야 할 시기도 되어 그만 두게 되었다.
그치만 평생 일 하며 살텐데 벌써부터 일 하기 싫다는 핑계로 취업 준비를 차일피일 미뤘고, 그러다가 친구의 소개로 정부의 청년 일자리 창출 사업으로 논문 교정교열하는 일을 약 5개월 동안 하였다.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논문을 읽으며 띄어쓰기나 오탈자를 수정하는 일이었지만 할당량을 채우면 그냥 놀다가 6시에 퇴근 처리를 하면 되었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자기계발은 하나도 안 했던 것 같다. 인생을 에피소드로 살아왔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고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 일 같지 않은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만 했던 날들이었다.
논문 교정교열 사업 계약이 종료된 후 교육회사 컨텐츠 기획팀에 인턴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주로 맡은 업무는 교안 교정교열. 또 다시 교정교열 업무였다. 나중에 듣고 보니 논문 교정교열 업무를 했었어서 그거 하나 보고 뽑았다고 한다. 그만큼 교안 교정교열 업무의 비중이 높았는데, 퇴사 약 두 달 전부터 컨텐츠 기획팀이 신사업 기획팀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교정할 교안도 없고 할 일을 달라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업무가 없어서 하루종일 일하는 척 하다가 퇴근한 적도 있다. 업무가 생길랑 말랑 하던 시기가 계약이 종료될 즈음이었는데, 그래서인지 (감사하게도) 팀원들이 근무 연장 아니면 아예 정직원으로 들어 왔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주었다. 그러나 일 잘 하는 분들은 이미 다 퇴사하고 6명 중 3명이 신입이었던 신사업 팀에 또 나라는 신입이 들어가도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거절하고 퇴사를 했다.
퇴사를 한 후 몇 달 간은 운전 연습을 핑계로 아빠랑 여기저기 놀러다녔다. 얼마나 그렇게 지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8월 달에 엄마랑 미국에 가고 있었다. 목적은 이사한 언니네 집 구경하기. 엄마는 일이주 남짓 지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셨고 어처피 백수인 나는 언제 미국에 이렇게 오래 있을 수 있겠냐며 약 두 달을 미국에서 보내게 되었다. 언니 일 다녀 올 때까지 기다리기, JLPT 공부하기, 책 읽기, 동물들이랑 놀기 등등을 하며 끝내주는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지내다가 느낀 건 '시간은 정말 빨리 간다'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는데 나는 지금까지 뭘 했지? 라는 생각을 하다보니 시간이 더 빨리 가기 전에 하고 싶던 걸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게 없던 나였지만 그럼에도 지난 몇 년 간 유일하게 하고 싶었던 게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일본에 가서 살아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일본어로 도돌이표. '이럴 줄 알았으면 일문학과로 전과를 하는 거였는데'라는 후회의 말이 턱끝까지 차오른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기'가 좌우명인데 이것에 대해선 평생 후회할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평생 후회할 것 같은 것, 그건 바로 일본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 코로나 시기에 일본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면서 일본에 대한 갈망이 더 커졌고 그게 일본에서 살아 보고 싶다는 야심으로까지 커졌다.
한국에 돌아와서 JLPT를 취득했고, 일본에 갈 방법을 알아 보고 있었다. 원래는 워킹홀리데이로 가고 싶었으나 아직 코로나의 여파가 남아있어서 결국 어학연수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학교를 알아보고 결정을 한 뒤, 거의 하루만에 모든 서류를 준비했던 것 같다. 출국하기 전까지 약 두 달 간 일본어 회화 학원을 다니며 일본어를 입에 좀 붙였고 그렇게 또 다시 뭐라도 하니까 다른 건 안 하는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코로나 전에도 일본에서 살아 보고 싶었지만 포기했던 여러 이유 중 하나가 짐을 싸고, 보내고, 일본 도착해서도 생활용품들을 구매하는 이런 모든 일련의 과정들을 생각했을 때 귀찮고 번거로워서였다.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내 성격 중 가장 강한 '귀찮음'이라는 마음을 이겼다. 준비 과정은 정말 귀찮았지만 그래도 해냈고, 아직도 출국 전 날 천장을 바라보며 했던 생각이 생생히 기억난다.
'당장 소행성이 충돌해서 지구가 멸망한다는 생각보다 내일부터 일본에서 산다는 게 더 상상이 안가'
일본 생활은 정말 만족 그자체였다. 학교도 다니고, 새로운 사람들도 사귀고,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여행도 다니고. 한국에서는 정말 집에만 있던 나인데 일본에 가고 보니, 집에만 있던 날들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밖에 없었다. 초반엔 일본에서의 취업도 생각해 보았지만 지내다보니 편의점 가는 것만으로도 긴장하는 그런 삶을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느낀 건데 워킹홀리데이로 갔으면 못 버티고 금방 돌아왔을 것 같다. 코로나 때문에 어학연수로 간 게 일종의 구원이라는 느낌이 든다. 어찌되었든 내가 느낀 건 2등 시민으로는 못 살 것 같다는 거였다.
슬슬 한국으로 돌아와야할 시기가 될 쯤엔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말 너무 우울해서 강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다. 눈물을 흘렸어도 일본에서 취업하지 않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에 얌전히 한국에 돌아왔고, 나는 바로 자격증을 취득하기 시작했다. 자격증 공부는 쉬웠다. 생각 없이 공부만 하면 되니까. 문제는 목표했던 자격증을 취득한 후였다. 이제 진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할 수 있을지 생각을 해서 이력서를 작성하고 기업들에 지원을 해야 한다. 여기서 내가 잘못한 점이 하나 있다면 조바심이 난 나머지 스스로를 파악하지 않은 채 대체로 비상경문과들이 지원하는 직무들을 따라서 지원했다는 것이다. 나조차도 이 산업과 이 직무를 지원한 나에게 자신이 없는데 면접관들은 그게 더 느껴졌겠지.
그렇게 취업 사이트는 계속 들어가는 채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정말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아니 사실 있었다. 나는 어찌되었든 문화컨텐츠쪽이 하고 싶었고, 어렸을 때부터 엔터업계에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건 알고 있고, 그렇게 나에게 있어 '하고 싶은 게 없다'는 뜻은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에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게 없다'는 뜻이 되었다. 하고 싶은 걸 못 해 그래서 하고 싶은 게 없어.
언제는 '어렸을 때 키자니아에 한 번을 못 가서 이렇게까지 하고 싶은 게 없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취업 사이트 공고에 올라오는 모든 직무들이 다 나랑 안 맞는 것 같았고, 그러다보니 하고 싶은 직무도 없었다. 아니 하고 싶은 직무가 없었기에 모든 직무들이 다 나랑 안 맞는 것 같은 건가? 어렸을 때 다양한 직무의 인턴을 해봤어야 했던 걸까? 결국 인턴 활동이 성인이 되어서 체험해 보는 키자니아 같은 건가?
하루하루 에피소드식으로 살던 나에게 갑자기 나라는 내러티브를 책임질 직업을 구하라고 하니 막막하다. 그리고 아직도 난 뭘 해야 좋을지 못 찾고 있다. 취업이라는 게 사람을 갉아 먹는 일이라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라는 생각이 '잘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으로 바뀌고, 이 생각은 다시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져 버렸다. 하고 싶은 걸 못 해서 하고 싶은 게 없는데 난 뭘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