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강 Oct 25. 2024

교사로 보낸 한평생

고등학생들에게 수업 중에 질문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30년 넘게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퇴직한 지 이제 일 년 남짓 되었다.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참으로 다양한 학생들을 만났다. 그 학생들의 공통점이 있었다. 질문을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학생들은 내가 질문하는 것도 싫어했고 학생들더러 질문하라고 하는 것도 싫어했다. 질문 자체를 싫어하는 듯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종종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의문문을 참 싫어하는구나."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곤 했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질문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학교 수업 중에 질문을 했을 때 교사에게서 그다지 격려를 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 후반에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그 당시의 수업 풍경을 떠올려 보면, 대부분의 교사들은 학생들의 질문에, 교과 진도를 나가야 해서 수업 중에 답해 주기 곤란하니 쉬는 시간에 다시 질문하라는 말을 하곤 했다. 1980년대 후반에 교직 생활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학생들이 질문을 하면 나도, 고등학교 때 내 선생님들이 하던 말을 학생들에게 하고 있었다. 내 동료 교사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학생들의 질문에 대한 반응은 나와 비슷했다.


  학생들의 질문을 대하는 교사들의 이런 태도가, 학생들이 수업 중 침묵으로 일관하는 데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한다. 2010년대 중반에, 나 홀로 미친 듯이 떠들고 학생들은 침묵 속으로 침잠하는 수업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다.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고 여러 가지 책을 참고하며 학생들의 침묵을 깰 수 있는 수업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018년에, 지금까지의 수업과는 완전히 다른 수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즉시 이를 실행에 옮겼다. '학생들의 질문 만들기에서 시작하는 수업'이었다. 다시 말하면, 학생들이 질문을 만들지 않으면 시작되지 않는 수업이었다. 수업이 아예 진행되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내 나름대로 준비를 철저히 했다고 자부는 했으나, 실전은 또 다른 문제이니 말이다.


  주로 고등학교 3학년을 가르치다가, 2018년에 고등학교 1학년을 맡게 된 것이 어쩌면 행운이었는지 모른다. 고등학교 물을 처음 먹게 되는 학생들이니 만큼 새로운 수업 방식을 받아들이기가 상대적으로 쉬웠으리라 생각한다. 또 내가 가르친 과목은 국어였고 학생들은 일반계 고등학교의 여학생들이었다. 내가 구상한 새로운 수업을 시작하는 데에 이보다 더 나은 여건을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 하나 찾는 것만큼 어려웠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2018년 그해, 실패의 예감과 성공에의 기대가 공존하는 나의 '학생들의 질문 만들기에서 시작하는 수업'은 시작되었다. 첫 시간, 어떻게 수업을 진행할지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학생들은 말 한마디 없이 조용했다. 3월 고등학교 1학년 교실의 수업 풍경은 고요 그 자체일 경우가 태반이지만, 2018년 그때 내 첫 수업 시간 교실의 고요는 일반적인 고요와는 차원이 좀 달랐다. 이제껏 만나보지 않은, 낯설고 새로운 수업 방식을 맞닥뜨려야 하는 부담감에서 오는 고요라고 하는 편이 적당하겠다.


  내 국어 수업 얼개는 대강 이러했다. 맨 먼저 지문을 함께 읽고 각자 질문 두 개를 만든다. 옆 짝꿍에게 질문하여 짝꿍의 답을 정리한다. 그런 다음 앞의 두 사람이 뒤로 돌아앉아 뒤의 두 사람과 모둠을 만든다. 한 모둠당 8개의 질문을 가지고 있게 된다. 그 8개의 질문 중에서 가장 좋은 질문을 뽑게 하고 그 모둠 대표 질문에 대한 모둠 공통의 대답을 만든다. 선택된 대표 질문은 모둠원들 사이의 토의를 거쳐 좀 더 그럴싸한 질문으로 가공할 수 있다. 그 과정이 끝난 모둠은 그 모둠의 대표 질문을 칠판에 적는다. 모든 모둠이 대표 질문을 칠판에 적으면, 각 모둠은 칠판에 적힌 각 모둠의 대표 질문 중 하나를 선택하여 모둠 공통의 대답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모둠 대표 질문에 대해 각 모둠이 만든 대답을 듣는다. 이때 어떤 대표 질문은 그 어떤 모둠의 선택을 받지 못할 수도 있고 반대로 여러 모둠의 선택을 받는 대표 질문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모둠 대표 질문을 잘 선택해야 한다. 대답이 너무 뻔한 질문이거나 지문 내용과 터무니없이 동떨어진 질문은 대개 선택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 교사는 수업 시간에 도대체 무엇을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교사는 그냥 놀고먹는 거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는 않다. 이 모든 수업 과정이 물 흐르듯 흘러가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teacher)'가 아니라 '조정자(coordinator)'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두 학생이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동안, 모둠원 네 명이 모둠 대표 질문을 선정하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교사는 학생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들이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격려하거나 학생들의 질문에 답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수업이 원활하게 진행된다.


  수업 방향에 대해 이야기한 첫 번째 시간이 지나고 두 번째 시간.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등나무 운동장 이야기'라는 제목의 비문학 지문이었다. 모두 함께 지문을 읽고 각자 두 개의 질문을 만들고 짝꿍의 대답을 들었다. 이제 네 명씩 모둠을 만든 다음, 총 여덟 개의 질문 중 하나를 모둠 대표 질문으로 선정하는 시간이 되었다. 내가 활동 방법을 다시 한번 설명하고 모둠별로 활동을 시작하라고 이야기하자 한두 학생이 입을 떼기 시작하더니 이내 온 교실에 아이들의 소리가 꽉 들어찼다. 새 떼들의 지저귐 같기도 하고 숲 속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 같기도 해서, 참으로 듣기 좋았다. 그때까지의 내 모든 수업을 통틀어 가장 시끄러운 순간이었다.


  2018년에 그렇게 시작한 나의 '학생들의 질문 만들기에서 시작하는 수업'은 내가 퇴직한 2023년까지 계속되었다. 내 교직 생활의 황금기라고 생각한다. 수업이 재미있었다. 교실에 들어가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수업에 좀 늦게 들어가려고 시작종이 쳐야 비로소 교무실 의자에서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는 교사들도 제법 있었는데(이런 식의 수업을 하기 전 나의 모습 또한 그러했다), 나는 수업 시작 1~2분 전에 교실 문 앞에 서 있다가 시작 종이 치면 교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수업했을 때 최대 장점은 졸거나 자는 학생이 없다는 점이다. 교사가 주도하는 설명 위주의 수업을 하면 반은 졸고 반은 잔다. 졸고 있는 반 중에서 문득 졸음을 떨치고 교사의 말을 받아 적는 학생이 간간이 생기는 것이다. 하긴, 그렇게 시끄러운데 잠이 오겠는가. 또 짝꿍과 이야기한 다음, 모둠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모둠원들의 말을 듣기도 해야 하니 잠잘 짬이 나질 않을 터이다.


  수업 중 학생들의 표정을 보면 대개는 이런 형태의 수업을 좋아하는 티가 역력했다. 물론 학생들 모두가 이런 수업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나와 함께한 학생들의 성향으로 볼 때,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그래도 그런 학생들의 비율이 높지는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한 학기 수업이 끝난 뒤, 함께한 수업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는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 학생들 중 90% 이상이 우리가 함께한 수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학생들이 학교 정기 고사(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대비 공부는 어떻게 하지?'라는 의문이 들 법하다. 이런 식의 수업은, 학생들의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어 공부 근육을 키워 준다. 학생들의 내신 성적이 떨어지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공부가 학교 정기 고사 문제를 푸는 데에 '직접적'으로 연계되지는 않으므로 학생들이 불안해할 여지가 있다. 그 불안감을 해소해 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정기 고사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참고서에 설명되어 있는, 교사 주도의 수업에서 수업의 주를 이루는 내용)을 단원별로 정리한 다음 프린트해서 나누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한 단원 수업이 끝나면, 그 프린트에 있는 내용에 대해 질의응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때 학생들이 질문하면 내가 곧바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다른 학생을 찾아 그 학생의 대답을 먼저 들었다. 그 학생의 대답이 미진하다 싶으면 또 따른 학생을 찾았다. 나는 최종적으로 보충 설명을 약간 덧붙일 뿐이었다. 그렇게 한 결과, 학생들의 내신 성적이 다른 반 학생들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다른 반 학생들의 성적을 압도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교직 생활의 말년을 행복하게 보냈다. 끝이 좋으니 다 좋게 보였다. 30년 넘게 교직에 있으면서, 분명 쓰디쓴 맛을 본 적도 있을 터인데 어쩐 일인지 그런 건 생각나지 않는다. 말년의 행복한 기억이 그 우울한 기억들을 정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만하면 한 사람의 교사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말년의 내 수업이 절대적으로 옳은, 최선의 수업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꼭 밝히고 싶다. 참 즐겁게 수업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학생들과 학생들 사이에 또 학생들과 나 사이에, 수업을 통해 서로 소통하며 참 즐겁게 지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 당시 나와 함께한 학생들에게 딱 들어맞는 수업 방식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여, 지금 현직에 있는 후배 교사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지금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 딱 들어맞는 수업 방식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라고, 그래서 그런 수업 방식을 꼭 찾으라고. 그러면 교직 생활이 참으로 즐거워지리니.

작가의 이전글 손녀딸과 함께하는 하루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