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하원 길에, 손녀딸이 오늘은 스쿠터를 가지고 자기를 데리러 오라고 했다. 날씨가 꽤 차갑다. 손녀딸 옷차림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어제 딸내미에게 말해 두었더니, 딸내미가 준비를 옹골차게 해 놓았다. 장갑, 마스크, 모자, 도톰한 겉옷 등. 이만하면 즐겁게 스쿠터를 타고 손녀딸과 하원할 수 있을 듯하다.
오늘 손녀딸은 7시 20분쯤 거실로 걸어 나왔다. 애착 인형 보노를 꼭 껴안은 채로. 추울까 싶어, 이불로 폭 감싼 뒤 한동안 안아 주었다. 3분~4분 동안 꼼짝 않고 그대로 안겨 있는다. 포근했나 보다. 손녀딸이 너무 심심해 보여서 "TV 보여줄까?"라고 했더니 몸을 뒤로 활처럼 구부리며 "티비, 티비"라고 외친다. 뭘 보겠냐고 물었더니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텔레비전에 떠 있는 여러 가지 시청 프로그램 목록에서 골라보라고 해도, 고르지는 않고 자꾸 뭐라고 외치기만 한다. 어쩔 수 없이, 내 마음대로 '아기 상어' 영어 버전을 틀어 주었다. 싫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군소리 없이 잘 본다. 손녀딸이 원한 게 분명 '아기 상어'는 아니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오늘은 등원 준비가 아주 매끄럽게 이루어졌다. 가장 별 탈 없이 등원 준비가 이루어진 날이지 싶다. 손녀딸이 까탈을 부린 거라곤, 아내가 얼굴에 로션을 발라주다 로션이 눈가에 묻자 손녀딸이 "할머니!"라고 외친 것뿐이다. 하나 더 있다면, '아기 상어'를 다 본 다음 '베베핀' 영어 버전을 틀어 주자, "아니, 그거 말고 우리말 우리말'하고 외친 것이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 흠잡을 데 없이, 물 흐르듯 등원 준비가 이루어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았으면 얼마나 좋으랴.
어린이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손녀딸은 할머니와 즐겁게 역할 놀이를 했다. 역할 놀이할 때 손녀딸의 목소리는,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이 세상 모든 어린아이의 목소리는 귀여울 테지만, 우리 손녀딸의 목소리는 적어도 상위 10% 안에 들지 않을까 싶다. 물론 할아버지의 편향적 주관이 작용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객관적'으로 보아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굳건하게 가지고 있다.
어린이집에 도착해 신발장 앞에서 신발을 갈아 신기는데, 원감 선생님이 손녀딸의 푸른색 원피스가 예쁘다고 칭찬해 주었다. 어린이집에서 정한 오늘의 색깔 코드가 '블루'라고 해서, 거기에 맞춰 신경 써서 입힌 보람이 있다. 손녀딸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신발장 앞에서 만난 같은 반 친구의 손을 잡고, 손녀딸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손녀딸은 어린이집 앞에서 친구를 만나면 늘 먼저 손을 내민다. 이런 마음을 커서도 간직해서 다른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마음 따뜻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터이다.
손녀딸 요청대로 스쿠터를 몰고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아내는 차를 가지고 딸네 집으로 오기로 했다. 어린이집 옆에 있는 붕어 놀이터(미끄럼틀 옆면이 붕어 모양으로 되어 있어 손녀딸이 그렇게 부른다)에 스쿠터를 대고 잠시 기다리니 손녀딸이 나왔다. 손에는 제법 큼직한 파란색 바람개비를 들고 있다. 붕어 놀이터에서 놀다 가겠대서 손을 잡고 놀이터로 갔다.
그런데 스쿠터를 발견하고는 곧장 스쿠터로 달려간다. 준비해 온 마스크를 씌웠다. 3주 전쯤 스쿠터로 하원할 때 입이 따갑다며 호들갑을 떨기에 준비해 온 터다.
파란색 바람개비가 문제였다. 스쿠터에 고정시킬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손에 들고 스쿠터를 몰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손녀딸의 어린이집 가방을 스쿠터 손잡이에 걸고 바람개비를 가방에 꽂은 다음 가방 지퍼를 잠가 바람개비를 최대한 고정시켰다. 스쿠터가 달리기 시작하자 바람개비도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손녀딸은 그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 바람개비가 엄청 빨리 돌아요."라며 무척 즐거워했다. 그렇게 신나게 자전거 도로를 달려 딸네 집에 도착했다.
딸네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 낭패다. 아내보다 우리가 먼저 도착했다. 아침에 손녀딸 이부자리와 애착 인형 보노를 세탁하려고 우리 집으로 가지고 간 터다. 아내가 세탁을 마친 보노를 데리고 먼저 딸네 집에 도착해 있으려고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즉, 지금 이 순간 손녀딸이 있는 이 공간에 보노가 없는 것이다.
식은땀 한 줄기가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듯했다. 보노가 없을 때 손녀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애써 침착을 가장하고 손녀딸에게 화장실로 가 손을 씻으라고 했다. 화장실로 간 손녀딸은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어 놓고 장난감 주전자에 물을 받더니 그걸 색색의 플라스틱 컵에 따르는 놀이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라고 물었더니, "티(tea) 따르는 거잖아."라며 "할아버지도 해."라며 또 다른 장난감 주전자를 건넨다. 얼마나 다행이던지! 손녀딸은, 초록색 컵에 있는 건 아보카도 티, 빨간색 컵에 있는 건 딸기 티, 주황색 컵에 있는 건 귤 티 라며 한동안 놀이에 열중했다.
그러는 사이 아내가 도착했고 깨끗하고 뽀송뽀송해진 보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거실 바닥에 자연스럽게 놓였다. 티 따르기 놀이를 마친 손녀딸이 거실로 달려가더니 보노 꼬리에 제 입술을 대고 문지른다. 아내와 내가 '보노 쪽쪽이'라고 부르는, 손녀딸의 루틴이다. 걷잡을 수 없게 일어날 뻔했던 폭풍우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보노와 인사를 마친 손녀딸은 역할 놀이에 한창이다. 손녀딸이 역할 놀이 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동화책에 나오는 상황과 손녀딸이 가지고 있는 인형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놀이를 하는데, 네 살배기 치고는 제법 수준이 높다. 주로 할머니를 역할 놀이 상대로 낙점하는데, 오늘은 아내가 딸네 집안일을 하느라 바쁘다. 그러니 꿩 대신 닭이라고, 나를 역할 놀이에 끼게 한다. 그러더니 애가 역할 놀이에 영 젬병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손녀딸 혼자 1인 역할 놀이를 한다. 나는, 내가 좀 분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손녀딸이 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딸내미가 퇴근해서 왔다. 딸내미가 씻고 나오는 동안 손녀딸을 좀 더 보아주다가, 아내와 나는 집으로 향했다. 내일은 사위가 쉬는 날이다. 사위가 손녀딸 등원과 하원을 온통 책임진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니, 오늘 밤은 더욱 편안한 밤이 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