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학교생활기록부!
지방 소도시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30년 넘게 근무하고 퇴직한 지 1년 하고도 6개월이 되었다. 얼마 전, 현직에 있는 후배 교사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는데, 학교생활기록부의 '과목별 세부 능력 및 특기 사항(세특)' 쓰느라고 몹시 바쁘단다. 그 후배가 보낸 메시지에는 '계속 세특 쓰는 중, 죽을 듯, 머리 다 빠짐'이라고 쓰여 있었다. 2월 초에 주고받은 메시지였는데, 방학 기간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세특' 기록에 매달려야 하는 교사들의 현실을 잘 알 수 있게 해 주는 메시지였다.
동시에 학교생활기록부 '세특' 기록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메시지라고 할 수도 있다. 2월 초쯤이면 생활기록부 모든 학생들의 '세특' 기록이 이미 완성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후배 교사의 메시지처럼 이 시점에서 '계속 세특 쓰는 중'이면 안 된다. '세특'을 이미 완성해 놓고 각 학생들에게 최종적으로 오탈자 교정 등의 점검만을 남겨 놓아야 할 시점이다. 대개의 일반계 고등학교에서는 교사들끼리의 교차 점검을 마친 '세특'의 작성 시점을 1월 말로 접는다. 그래야 2월 초에 학생들에게 확인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후배 교사처럼 2월 초에도 '계속 세특 쓰는 중'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두루 알다시피, '세특'은 내신 성적과 함께 학생부 종합 전형에서 핵심적인 전형 요소로 활용된다. 하여, 모든 생활기록부의 기록은 세 차례의 점검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세 차례의 점검을 마친 생활기록부의 기록을 학생들에게 최종적으로 한 번 더 점검하게 하는 것이다. 2월 초에도 '계속 세특 쓰는 중'이라는 말은, 이 점검 과정이 생략된 채 '세특'이 학생들의 최종 점검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생활기록부 기재 요령'의 규정을 지키지 않는 행위이다.
그런데 2월 초에도 '계속 세특 쓰는 중'인 교사가 그 학교에서 그 후배 교사 하나뿐일까? 결코 그렇지 않을 듯하다. 현직에 있을 당시를 돌이켜 보면, 학교에서 규정한 '세특' 작성 시한인 1월 말까지 '세특' 작성을 마친 교사의 비율은 아무리 많게 잡아도 20%를 넘지 못했다. 특정한 어느 한 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개 그랬다. 그런 형편이니 '세특' 작성을 기한 내에 마치고 교차 점검을 하려 해도 교차 점검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점검을 해 주어야 할 교사가 아직 자신이 담당한 과목의 '세특'을 계속 쓰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고백건대, 내가 쓴 '세특'을 다른 교사한테 꼼꼼하게 점검받은 기억이 전혀 없다.
학생들에게 '세특'을 보여주는 날짜는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방학 중 학생들을 등교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경우 '세특'의 기록은 그 어떤 점검 과정도 없이 학생들에게 보이게 되고 학생들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그대로 생활기록부에 기재된다. 다시 말해, 오롯이 담당 교사 개인의 머릿속에서 창출된 '세특'이 생활기록부에 기재된다는 말이다. 학생부 종합 전형에서 핵심 전형 요소로 활용되는 '세특' 기록에 대한 점검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일반계 고등학교 교사들 대부분이 매우 양심적이고 상식적인 사람들이기에 지금껏 '세특' 기록에 관한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계속 그대로 방치한다면, 큰 문제가 발생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는가?
사실 '세특' 기록과 관련한 소소한(?) 문제는 내가 현직에 있는 동안에도 종종 있었다. 기억에 남는 일 한 가지를 이야기해 보겠다. 2019년에 3학년 부장 교사를 맡게 되어, 이미 대학에 진학한 우수 학생들의 생활기록부를 참조했다. 내가 맡은 학생들의 진학 지도에 도움이 될 듯해서이다. 두 학생의 생활기록부 '세특' 기록을 보다가 정말로 너무너무 깜짝 놀랐다. 문과와 이과에서 1등으로 졸업하고 각기 다른 서울의 상위권 대학으로 진학한 두 학생의 생활기록부 '세특' 기록이었다. 그 둘의 1학년 수학 '세특' 기록이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완벽하게 똑같았다. 심지어 오탈자까지도. '복사해서 붙여 넣기' 신공을 발휘한 것이다. 그 두 학생이 서로 다른 대학에 진학했기에 대학 입학 전형 과정에서도 걸러지지 않았을 터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같은 고등학교 출신의 학생이 서로 다른 대학에 지원했을 경우, 똑같은 내용의 생활기록부 기재 사항을 걸러낼 장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 두 학생은, 자신의 것이 아닐 수도 있는 '세특' 기록 내용을 발판으로 서울 상위권 대학 진학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1학년 수학 '세특' 기록만이 그 두 학생의 대학 진학 성공에 기여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또 그 수학 '세특' 기록의 '복사해서 붙여 넣기' 행위가 그 두 학생에게만 국한했는지 할 도리도 없는 터 아니겠는가.
이런 '복사해서 붙여 넣기' 문제는, 생활기록부 기재 요령과 각 학교의 생활기록부 기록 계획대로 생활기록부 기재 내용에 대한 세 차례의 점검을 제대로 이행만 했다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항이다. 그런데 각 고등학교에서 이 '세 차례의 점검' 계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 이 계획은 그냥 서류상의, 계획상의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 계획만 그럴듯하게 세울 뿐 그 계획을 실제로 실행하지는 않았다. 점검만 제대로 했더라면 아주 손쉽게 잡아낼 수 있는 '복사해서 붙여 넣기' 문제조차 잡아내지 못했으니, '무조건 미화하고 과장해서 적기', '과목과 상관없는 내용 적기', '수업 계획과 무관한 내용 쓰기' 등의 문제들은 잡아낼 도리가 없을 터이다.
생활기록부 '세특' 기록에 대한 점검을 제대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담당 교사 모두가 12월 말까지 '세특' 기록의 입력을 완료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런 다음 1월 초에 그 기록을 출력하여 담당 교사가 점검(1차 점검)하고, 1월 중순에 동일 교과 교사가 점검(2차 점검)한 다음, 1월 말에 생활기록부 담당 부서에서 최종 점검(3차 점검)하는 과정을 거치면 된다. 마지막으로 2월 초에 학생들에게 '세특' 기록을 확인하게 한 다음, 필요한 부분을 수정하여 '세특' 기록을 확정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신뢰성 있는 '세특' 기록이 되리라 생각한다.
현직에 있을 당시, 내가 근무한 그 어떤 고등학교에서도 앞에서 말한 '세 차례의 점검' 과정을 실제적으로 거치지 않았다. '세 차례의 점검' 과정을 거친 것처럼, 서류를 꾸몄을 뿐이다. 겉으로 보면 '세 차례의 점검' 과정을 충실이 거친 것처럼 보인다. 단계별로 담당자의 서명 또는 날인이 뚜렷한 서류가 존재하기에 말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 중요한 생활기록부 '세특' 기록 점검 과정이 이처럼 허술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세특' 기록에 대한 '세 차례의 점검'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사들의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12월 말까지는 담당 과목에 대한 '세특' 기록 입력을 마쳐야만 한다. 학기 중 틈틈이 '세특' 기록 준비를 한 다음, 기말고사 이후 입력을 시작한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기말고사 이후 또는 겨울방학 시작한 다음, 이제 슬슬 '세특'을 써 볼까 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때 시작하면, 2월 초나 되어야 간신히 '세특' 입력을 끝마칠 수 있을 터이다.
사람이 생각을 전환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터이지만 교사들이 '세특' 기록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환골탈태하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한다. 학교 관리자(교장, 교감)들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세특' 기록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교사들을 독려해야 한다. 내가 현직에 있을 당시를 돌이켜 보니, '세특' 기록하는 시기에 '세특' 기록에 대해 독려하는 이야기를 꾸준히 하는 학교 관리자들을 단 한 명도 만나지를 못했다. '세특' 기록이 학생들의 대학 진학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학생들의 '세특'을 기록하기 위해 지금 이 시간에도 애를 쓰는 교사들이 많이 있을 터이다. 그들의 땀방울을 참으로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세특' 기록에 대한 '세 차례의 점검' 과정은 꼭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교사들과 학교 관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효율적인 실행 방안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