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절대악을이해하기 위한 인간의여정(추격자,황해,곡성)

나홍진 감독의작품세계

by 신세종

살다 보면 우리에게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하게 된다

더 깊게 이야기하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근본적이고 우리가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의 불행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좋았고 행복했던 것보다도 불행하고 안타까웠던 기억만 남아있는 걸까


더 생각을 확장하면 이 불행을 내 힘으로 막아낼 수 있을까?!



보통의 영화의 경우 선과 악의 구도를 그린다면

나홍진 감독은 절대악과 거기에 대면하는 인간의 구도를 그린다

나홍진 감독의 첫 장편 영화 추격자를 보았을 때는 정말 충격적이었고

진짜 시간이 녹아버린 느낌이 들었다.

절대악으로 상징되는 하정우 씨와 거기에 직면하는 김윤석 씨가 나온다

하정우 씨는 마치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나오고 변화무쌍하기도 하다

반면에 김윤석 씨는 그저 당하기만 한다

하정우 씨를 잡아 놓고도 이 사람이 범인인지 아닌지 구별을 할 수 없다

결국에는 관객은 이미 하정우 씨가 범인인 줄 다아는 상황에서도

정작 김윤석 씨는 영화 제일 마지막에 가서야 하정우 씨가 범인 임을 확신한다



영화 황해의 경우도 매우 비슷하다

여기서는 배우의 상황이 뒤바뀌어 있다

김윤석 씨는 절대악으로 상징되는 살인을 밥 먹고 차마시 듯이 한다

아니 그의 말이나 어투에서 보면 기세나 풍채가 먹이사슬 최정점의 전문화된 육식동물이다

반면에 하정우 씨 같은 경우는 정글에 버려진 초식동물 같은 느낌이 든다

모든 상황에 두려워하고 아파하고 당황하면서 어쩔 줄 모르고 그저 당하기만 한다

김윤석 씨에게 그저 살인하도록 강요받는

하정우 씨는 마치 메피스토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 같기도 하다

아니 파우스트는 욕망이라고 채웠지만 하정우 씨는 그저 맞고 도망치기만 할 뿐이다


특히나 황해라는 영화의 첫 내레이션은 독자들로 하여금 영화에 몰입시키게 하고

또 싸늘한 비수처럼 꽂혀들어온다


내 나이 11살 때 동네에 개병(광견병)이 돌었다

개는 사람들에게 도살될 예정이었는데

마을을 도망쳐 버렸지만 이내 불쌍하리만큼 굶고 비쩍 마른 모습으로 돌아왔고

얼마 되지 않아 죽어버렸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그 개를 꺼내서 개고기를 해 먹었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개병이 돌고 있다


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짧은 독백을 이야기 전체로 확장시켜가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기서 개는 하정우 씨고 그렇게 하정우 씨가 마을 사람들에게 당해서 도망쳤다가

다시 연변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실제로 김윤석 씨가 연기한 면가 면정학은 개를 도살하는 개장수로 나온다

그의 등장은 여러 마리의 개를 끌고 다니면서 동네를 거니는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낸다.


추격자의 하정우 황해의 김윤석이 연기하는 악에는 딱히 이유나 뒤의 배경 설명은 없다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공포의 대상을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르만 신화의 로키가 그러하다.

그가 저지르는 악행에는 이유가 없다. 그래서 신들은 로키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곡성.jpg

더 나아가서 나홍진 감독님의 가장 최신작 곡성을 보면 이러한 감독님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아니 여기에 사람들의 편견이나 종교적인 것까지 녹여내며 이야기의 층위 자체를 더 두텁게 하였다.

더 복잡한 플롯과 더 복잡한 연계를 펼치며

마치 화려한 유화 작가처럼.

그림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기름 위에 물감을 붇고 또 물감 위에 기름을 붓고 또 물감을 덧 데어서

붙여 올리는 식으로 나중 가면 그 밑에 깔린 심연 속 무의식의 물감 색깔은 기억나지 않을 만큼

강렬한 붓터치를 선사한다.


나홍진 감독님은 악을 우리 자아에 감춰진 무의식 속 바닥에서 꺼내 올리지 않는다.


이것은 나홍진 감독님이 기독교인이라는 데에 어느 정도 생각의 기반을 두고 바라본다면


기독교의 세계에서 첫 악의 등장인 뱀은 우리의 내면 속에서 피어난 것이 아닌

외부의 존재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추격자 같은 경우. 망원동에 들어온 악,

황해 같은 경우 연변에서 날아들어온 악.

곡성은 일본에서 날아온 악.

악이란 것을 우리 인간 내면의 본성보다도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어떤 원관념을

상징화하고 캐릭터 화해서 그려내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캐릭터 역시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가져왔다.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인간은 연약하고 부족하고 실수하고 넘어지고

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

모든 진실을 가장 늦게 알아차리는 존재

추격자의 주인공은 가장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고

황해의 주인공 역시 가장 나중에 아내의 행방을 알게 된다.

곡성 역시 주인공은 가장 늦게 내가 했던 일에 대한 돌이켜 생각해보게 된다.


이렇게 염세적인 세계 관속에서 인간은 악을 이해하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하지만

끝내 악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그럼에도 그러한 무력감에 그저 주저앉는 게 아니라

추격자의 김윤석 씨 , 황해의 하정우 씨 , 곡성의 곽도원 씨는 아주 필사적으로 운명에 저항하고 싸워나간다.

방법이 무엇인지 답이 무엇인지 모른 채 자신이 처한 상황이 모른 채

그래도 발버둥 치며 열심히 살아내는 것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든 간에 우리 인간이 그런 공포와 두려움 앞에 필사의 저항하는 그 과정

그리고 절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고 일어나는 끈기

그러한 과정이 더 인간다운 모습이라는 것이다

결과에 무게추를 두는 것이 아닌

과정에 무게추를 두는 삶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불행

저항하지 못하는 절망을 맞이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그저 시스템에 운명에 그저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버티고 견디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그 과정이 인간다움을 지키는 것

그것이 휴머니즘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게 추격자에서도 황해에서도 곡성에서도 인물들은 엄청나게 뛰어다닌다.(실제로도 엄청 뛰어다닌다)


곡성 같은 경우 뛰어난 부분도 있지만 반대로

맥거핀을 걸어서 관객들이 혼란스럽게 만드는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영화 후반까지 도대체 누가 적이야?! 누가 아군이고?! 누구 말을 믿어야 하지.?!

마지막엔 그래서 뭐!?라는 거야?!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건 극 중의 관객의 심리상태를 곽도원 씨의 심리상태와 유사하게 만드는 것이다.

곽도원 씨 입장에서 천우희 씨를 믿어야 돼?! 황정민 씨를 믿어야 돼?!

아니 이 불행을 끝내려면 도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 하지?!.

그래서 결국 선택했는데

그 결과는.. 처참했다.


관객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결과는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하긴 힘들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이 선인지 악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 와중에 선택했는데. 최악일 경우가 더러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친구였던 거 같은데 뒤통수를 친다던지.

적인 거 같은데 알고 보니까 뒤에서 나를 챙겨주고 있었다던지.



다시 서두의 질문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곽도원 황정민.jpg

극 중 곽도원 씨는 황정민 씨로 표현되는 악에게 묻는다

"내 딸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악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냥. 네 딸이 걸린 거야. 이유 없이 그냥 미끼를 던졌는데 그냥 네 딸이 걸렸어. 그래서 그렇게 됐어."

한마디로 우연이 그렇게 된 것이라고


다크 나이트의 투페이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

둘의 공통점은 동전 던지기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

앞면이 나오면 살리고 뒷면이 나오면 죽인다.

이 말인즉은 운이라는 요소에 삶의 운명을 걸었다.

우연이라는 악마에 연을 걸었다는 것이다.

투페이스 동전.jpg
안톤쉬거.jpg


투페이스와 안톤 쉬거의 최후도 우연으로 죽는다. 우연이라는 악마도 우연이라는 인연에 죽게 된다.


모든 일이 우연으로 이루어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내가 땀 흘려 일하지 않아도 소산을 얻게 되면 모두 다 일하지 않고 그저 넋 놓고 멍하니 하늘만 보게 된다

왜냐면 일하든 일하지 않든 얻는 소산은 우연하게 얻어지고 그저 기회를 잡기만 하면 되니까

인과 관계를 부정해버리면. 모든 것이 허무하게 되어라고 모든 것이 의미가 없게 되어 버리니까.

그것이 인간을 악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그것을 나홍진 감독은 악이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싶다

노력을 배신하는 사회 모든 것이 운으로 이루어진 세상.



천우희.jpg

천우희 씨 캐릭터 무명(이름 없음)에 대해서

무명이라는 이름도 영화를 다 보고 난 관객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원래 영화에서는 이름이 아예 없다.

이름 없는 들꽃같은 케릭터이다.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옆에 앉아있는 꽃처럼 나온다.

천우희 씨는 등장하는 순간순간마다 자연에 조화돼서 나온다.

풀밭을 거닐고 산 위에서 관망하고 돌멩이를 던지고 나뭇잎 사이에서 등장하고

또 사람을 가는 길을 돌리기 위해 벼락을 떨어뜨린다던지 등장할 때 비바람이 떨어진다던지


자연(스스로 자 自 그러할 연 然) 스스로 그러한 존재

나는 원래 나야.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

이 관점은 힌두교나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 등 모든 종교의 신이 하는 말이다.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 그렇게 들꽃처럼 민들레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그 자리에 있는 신의 존재를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지 천우희 씨는 등장하고 영화 내에서 몇십 분 동안 안 나오다가

갑자기 나와서 이야기 툭 던져주고 가고

영화 중간에 누군가의 그림자만 보이는데 발소리 바스락 거리고

그림자 휘리릭 거리며 지나가는 장면이 유난히 많은데

영화가 다 끝나고 보면 그건 천우희 씨로 표현되는 자연이 아니었나?! 싶다.


자연은 늘 우리 주변에 있고 늘 우리와 함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쉽게 인지 하지 못하고 넘어간다

왜냐하면 자연은 원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고, 원래 그러한 것을 우리는 당연하게 인정해버린다

스스로 그러한 질서와 규칙성은 우리 인간이 바꿀 수 없다.

바람이 부는데 내가 바람을 멈출 거야 마음먹는다고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인간이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흐름 자체가 자연이고

그것이 초월적 존재인 선이라고

나홍진 감독은 이야기하고 있다.


선으로 표현되는 무명은

종교처럼 표현된다

어떤 일이 발생하면 그것을 인과율에 따라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는 과정


종교의 시스템에서 불행의 원인을

네가 전생에 잘못해서, 네가 제대로 예배하지 않아서, 네가 부정 타는 일을 해서.

이유는 여러 가지로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악과 결정적 차이는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행동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해답은 존재한다는 것.

해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발버둥 치면서 찾아낼 것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고 대신 그걸 지켜보는 것을 선택한다.

우리를 지켜보는 존재. 자연에 녹아내려 우리의 삶을 관망하는 존재.

그걸 표현해낸 것이 천우희 씨의 무명이다.



내가 믿는 기독교에서 신이 나를 바라볼 때.

나도 힘들고 두려운 일을 많이 겪는다. 신이 나를 돕기에 그럼에도 이겨낼 수 있겠지 라고 다짐하지만

하지만 가끔은 너무 이해하기 힘든 어려움 앞에 두려워하지만.. 그럴 때마다 기도를 하곤 한다.

기도할 때마다 나는 내게 묻기도 하고 신께 묻기도 한다.


최근 들어서는 이런 기도를 많이 했던 것 같다.


"하나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정말 후회 없을 만큼 최선을 다 할 수 있게

정말 잘해 낼 수 있게 열정과 힘을 주시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포기할 수 있는 용기와

미련처럼 남겨진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자비를 주시고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그렇게 기도할 때면 나를 관망하는 수많은 자연을 만나게 된다.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을 이해하는 과정.

그것이 무명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스스로 그러하게 되어 가는 시스템 속에

나 또한 특별한 존재가 아닌

시스템 안에 그러하게 되어 가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라고.

우리는 저항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상황마다 다른 자연들이 움직이고 발버둥 치는 것처럼

우리 또한 함께 발버둥 치며 하모니를 코스모스를 이루는 것 그것이 자연이다.


그렇게 바람이 발버둥 치고 비가 발버둥 치고 나뭇잎이 발버둥 치는 것을 보고 그 지점에서 에너지를 받고

나 또한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되는 것 그것이 불행이라는 운명 앞에 인간이 맞서는 용기와 힘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마음을 두거나

미래에 마음을 둘 여유는 없다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삶 앞에

우리는 추격자의 김윤석 씨, 황해의 하정우 씨, 곡성의 곽도원 씨처럼

죽기 살기로 뛸 수밖에 없다.

그것이 무명이라는 자연.

하나님이 주는 인간의 숙명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속 해방 또한 간단하다

과거의 실수에 연연할 필요도 미래의 두려움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과거와 미래는 우리가 컨트롤해서 바꿀 수 없다

과거의 실수도 아름다운 붓터치로

미래의 두려움도 견고한 블루프린트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실을 충실하게 살아 내는 것이다.

육중한 스트레스의 압박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모든 것을 잊고 현재에 몰두하는 것

그것이 진정 선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노력하고 더 다듬고 더 고치는 과정

그 과정이 신인 하나님이 내게 바라는 순간이다.

그렇게 노력할 때 니르바나(열반)에 도달하고 나 스스로 차분해지는 순간이 다가온다.


이건 의식주 문제에서 채워지지 않는 공허

인간적인 대화나 휘발성 감정으로 채울 수 없는 허무를 극복하고


나의 내면에서 오는 기도를 통해

이루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무명 이름이 없음은 반대로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숫자로 치면 0이라고 상징할 수 있지만 영을 분모로 내리면 무한이 되듯이

아무 이름 없는 자연이라는 것이 무한의 상징이 될 수도 있겠다.



주먹을 쥐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지만 (0)

손바닥을 펴면 세상 모든 것을 갖게 된다.(무한대)



천우희 씨로 표현되는 무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답을 이야기해준다.

꿈에 자꾸 일본인이 나오는 것은 곽도원 씨(너)를 말려 죽이려고 했다.

굿을 할 때도 원인 결과를 명확하게 이야기해준다.

종구 무명.jpg

곽도원 씨는 선인 천우희 씨 에게 똑같이 묻는다

"내 딸한테 왜 이런 일이?!"

천우희 씨는

"니 딸의 아비(곽도원)가 남을 의심하고 남을 죽이려고 하고 남을 죽여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서 A라는 걸 해서 B가 발생했어.


그것이 선의 입장이다.


물론 인과 관계의 요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실제로 의심하고 남을 죽여서 상황이 이 지경이 된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건에는 인과관계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뒤돌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선과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선은 우리를 그렇게 곱게 이해시켜주지 않는다.

곽도원 씨가

"네가 귀신이야 사람이야. 내가 이해를 해야 믿지."

그러자 천우희 씨는

"그냥 믿어."

이건 진짜 종교적인 관념과 비슷하다.

종교에서 신을 믿으라 할 때 단일한 해답 하나의 해답만 제시하고

모든 선택을 박탈시켜버리는 것

그것은 인간이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다.



사실 신이 인간을 창조하게 된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신과 인간이 교감하기 위해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을 예배라 표현하기도 하고 기도라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초월적 존재에 맡기는 것.

그것을 그냥 믿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이 받아들이기는 어렵기는 하겠다.

그럼에도 믿어버려서 종교에 귀의하게 되는 사람도 있기도 하다.


절대적 신뢰의 반대로 보면

의심..

곽도원 씨는 끝없이 의심하게 된다.

무명이 악인 것인가?! 황정민이 악인 것인가?! 일본인이 악인 것인가?!

뉴스에서 나오는 독버섯 때문인가

의심이 증폭되어 일본인이 악한 귀신이라는 소문.


사실 우리 인간은 인지할 수 있는 영역의 한계 때문에

절대적 신뢰로 도달하기 어렵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게 된다.(sky캐슬의 대사처럼)

부족하기 때문에 연약하기 때문에

어떤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나홍진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서

나홍진 감독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곡성은 위로의 영화라는 것이다.

?????

뭐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감독이 곽도원 씨 캐릭터를 위로하는 것이 설령 위로한다 해도

곽도원 씨가 캐릭터는 감독님의 멱살을 잡고

왜 나한테 왜 이런 일을 만들었어 라고 따질 거 같다.


하지만 그 감독과 곽도원 캐릭터의 분쟁을 바라보며

관객은

어쩔 수 없었구나.

그래 인간이라는 것이 연약하고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던 거구나.

그런 상처 받은 치유자들의 모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서로서로 이미 세상에서 상처 받았지만 상처 받은 사람끼리 보듬어주고 힘내라고

위로해주고 그런 어떤 공감대를 통한 위로를 건네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여러분 그동안의 삶이 많이 고되셨죠

저도 많이 힘들었지만 여기까지 왔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지나왔습니다.

이런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너도 나도 불행이 있었고 그것은 내가 열심히 발버둥 쳐보았지만

어쩔 수 없었고 지나고 보면 그저 정류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었고

나는 그 어떤 지향점으로 나아가고 있구나라고

위로해주는 영화가 아닌가 싶다.


인간이 한 상황에 대해서 한번밖에 선택할 수 없는 딜레마의 존재고

선택의 결과를 알 수없지만, 선택의 결과가 잘못되었다면

수정하면 된다. 실수하면 바꾸면 되고

실수할 때 실수했다고 인정하는 용기를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바꿔가면 된다.

그렇게 되면 타인의 실수나 잘못도 이해해주게 된다.

왜냐하면 나도 그러한 실수나 잘못을 하는 존재니까.


그렇게 용기 내서 나의 마음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는 것

그것이 인간의 삶이니까.



제 긴긴 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ㅡ^



keyword
작가의 이전글코린이의 코인 트레이딩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