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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반짝 Sep 21. 2024

별일 없지만 아무 일도 없는 건 아닌 하루

산불 2


산불이었다.


면적 90프로가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 동네에, 아직 봄싹이 채 올라오지 못하고 온천지 버썩 마른 낙엽가지들 가득한 산속에, 그것도 입구 아닌 중턱에서 폴폴 피어오르던 연기가 정상을 향해 무섭게 기세를 넓혀가고 있는 중이었다.


창고에 있던 진화 장비들이 모두 면사무소 앞마당으로 튀어나왔고, 산불감시원들과 직원들은 저마다 등짐펌프를 등에 메고 손에는 갈퀴를 든 채, 체험 산불의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근처 저수지에서 물주머니를 채운 진화 헬기가 굉음을 내며 이곳저곳을 바삐 움직였지만 거대한 산을 덮은 불길과 연기를 쉽사리 진압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어둠을 맞았다.


사무실에서 상황보고와 지원 업무를 하던 나는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현장으로 나가볼 수 있었다. 직원들과 함께 차를 타고 천천히 이동 한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불이 난 곳이 어디인지 바로 확인이 가능했다. 밤이 내려 배경화면이 검은색으로 바뀌자 초록초록했던 산등성이가 주황색 불꽃 띠로 뾰쪽 뾰족 테두리를 만들고 ‘여기 산 있어요, 여기 불도 있어요.' 하며 낮동안의 그 난리통을 비웃기라도 하듯 소리도 없이 태연하게 나무들을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었다.


지휘본부에 도착한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다.

끝을 알 수 없이 줄지어 서 있는 진화차량들, 이 동네 인구 다 합친 것보다도 많은 수의 사람들, 민방위 옷을 입은 채 누군가의 설명을 듣고 있는 군수님, 취재를 위해 모여든 기자들까지...

티브이 뉴스였는지, 재난 영화였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낯익은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벌어진 나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바로 불이다.

가까이서 본 산불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고, 짐작했던 것보다도 훨씬 무서웠다.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 지위가 무엇이든, 직업이 무엇이든, 나이가 많고 적든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자연 재난 앞에서는 그저 넋 놓고 바라보기밖에 할 수 없는 한낱 나약한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산불은 여유롭게 봉우리 하나를 잡아먹은 후 바람을 타고 또 다른 봉우리를 잡아먹으러 가는 중이었지만 우리는 그저 불길이 민가로 내려오는 것을 저지하고 지켜보며 그저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게 불은 비정하리만큼 밤새도록 제 할 일을 다 했고, 날이 밝자 인간들은 다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부가 차려진 마을회관에서 부녀회원들은 어쩌다 한번 있을 행사 때나 쓰던 큰 양은솥을 꺼내 콩나물 국을 끓여 국밥을 준비했고, 잔불 정리를 위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간식으로 먹을 주먹밥도 만들었다.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직원들의 가방에 주먹밥과 생수 한통씩을 넣어주는 것과, 식사 후 입가심 할 달달한 믹스커피 한잔씩을 대접하는 정도였다. 우리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들을 했고, 나는 공무원으로서 해야 할 일 하나를 더 경험하는 중이었다.


'덤벼봐 인간들아' 하던 불길은 18시간을 버틴 후에야 사그라들었고, 무성하던 초록 곳곳에 보기 싫은 검은 자국 여러 개를 남기고서야 길었던 산불 비상상황도 끝이 났다. 듣기로는 5만 평에 이르는 아까운 산림이 사라졌다고 했다. 산속을 빽빽이 채우고 있던 소나무 한그루, 한그루가 자라는데 수십 수백 년이 걸렸겠지만 그 인고의 시간을 재로 만드는 데는 채 하루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불의 원인은 허망하게도 누군가의 담배꽁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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