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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례짱 Nov 09. 2023

2) 수의사가 따뜻한게 그렇게 어렵냐

어렵네요...

 그렇다. 나는 이미 6년을 공부해서(사실 휴학+재수까지 8년) 수의사 면허까지 다 딴 다음에 알게 된 것이다.  직업이 정서적 교감이 필수인 직업임을. 


 수의사의 머리에 아무리 많은 것이 들어있어도 보호자님이 낙담하셔서 치료를 포기하시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그도 그럴 것이 학교 다니는 6년 내내 상담 기법이라던가, 보호자님을 위로해 주는 말솜씨, 친절한 눈웃음과 같은 서비스 정신보다는 이 동맥이 어디서 어디로 분지 되는지, 수술할 때 신경 써야 할 장기나 혈관이 어디에 있는지 등을 훨씬 더 많이 배우기 때문이다.


졸업만 하면 천재만재 수의사가 될 줄 알았던 가장 희망찼던 시절, 졸업학년의 나


 아, 진료실 안에서는 나의 학점도 학벌도 크게는 소용이 없구나. 나의 가장 큰 무기는 그것들인데 어떡하지. 내가 이 직업을 평생 즐겁게 잘할 수 있으면 뭐를 보강해야 할까.


 그 뒤로 나름 많은 것들을 시도해 본 것 같다. 처음에는 MBTI가 E_F_인 친구들의 리액션이나 사용하는 단어를 외웠다가 그대로 말해보곤 했다. 우리 집 고양이의 이야기를 하면서 공감대를 사려고 노력해보기도 했다. 이런저런 시도를 많이 해 보았으나 크게는.. 효과가 없었다.


 분명히 앞에 앉아계신 보호자님의 마음을 최대한 다치게 하지 않고 싶고 우리 병원에 오셔서 좋은 기분으로 돌아가셨으면 하는 이 열정은 뜨거운데.. 나는 왜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나는 이대로 무능력한 수의사, 무가치한 사람으로 그냥 살아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쓸데없이 깊고 무거운 방황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고민과 걱정은 때마침 새로 이직한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기까지 하면서 더욱더 심해지게 되었다. 업무에 자신이 없으니 병원 내 대인관계에서도 소극적이게 되고, 하루에 10시간 가까이 있는 근무지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니 다시 업무에 자신이 없게 되는 끝없는 악순환의 굴레가 시작되었다.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강아지랑 있는 게 더 편했던 그 시절(지금도 그렇다.)


 "오빠, 수의사가 천직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그게 아닌 거 같아. 애초에 내가 쓸모가 있는 사람이었던지도 잘 모르겠어."


 슬럼프에 빠진 나를 멱살 잡고 끌어올린 사람은 단연 지금의 남편이었다. 그는 내가 퇴근하고 저녁 식사 때마다 입 안에 밥을 넣고 흉하게 우는 것을 몇 번 보더니 본인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고 위로해 주며, 원한다면 상담 센터를 알아봐 주겠다고 말을 건넸다.


 그렇게 보호자와의 상담을 잘하려고 심리 상담을 본인이 받는 이상한 수의사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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