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1장 강해
우리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지식과 정보가 흘러넘치는 이른바 정보의 과잉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의 검색창 하나면 고대 이집트의 역사부터 최신 양자역학의 이론, 심지어 오늘 저녁에 방문할 식당의 상세한 후기까지 단 몇 초 만에 찾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글이나 수많은 온라인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엄청난 양의 정보를 얻고 있으며, 겉보기에는 과거의 그 어떤 세대보다 똑똑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과 삶의 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과연 우리가 더 지혜로워졌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는 깊은 침묵에 빠지게 됩니다. 지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축적되는 정보의 덩어리라면, 지혜는 그 지식을 바탕으로 올바르게 판단하고 가장 선한 행동의 길을 따르는 실천적인 능력입니다.
나아가 성경적 의미에서의 지혜는 인간의 좁은 시야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거룩한 능력입니다. 우리는 모니터 화면을 통해 온라인(on LINE)에서 무한한 정보를 얻고 있지만, 정작 우리 삶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방향을 제시해 주는 위로부터의(on HIGH) 지혜는 점점 메말라가고 있는 역설적인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갈증과 혼란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구약성경의 잠언은 단순한 처세술의 모음집이나 윤리 교과서가 아닙니다. 이 책은 탁월한 구약 신학자인 브루스 월키가 25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친 연구 끝에 통찰했듯, 고립된 문장들의 무작위적인 나열이 아니라 고도로 문학적이고 신학적으로 정교하게 배열된 생명의 교과서입니다.
잠언의 저자인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은 우리에게 삶의 본질을 꿰뚫는 진리를 전수하기 위해, 하늘의 지혜를 일상의 언어로 번역하여 탁월하게 담아냈습니다.
잠언의 영어 단어는 프라버브(Proverbs)입니다. 이는 라틴어에서 대신한다는 뜻을 가진 프로(Pro)와 단어, 말이라는 뜻을 가진 버브(Verbs)의 합성어로, 수많은 말을 대신하는 대표적인 말, 즉 삶의 정수를 담아낸 압축된 진리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어 원어로는 마샬이라고 부르는데, 이 단어는 비교하다, 비유하다라는 뜻과 함께 다스리다, 통치하다라는 의미의 어원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는 잠언이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을 넘어, 우리의 혼돈스러운 삶의 무질서를 다스리고 권위를 세워주는 하늘의 통치 원리임을 시사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방대하고도 깊은 지혜의 바다, 그 첫 번째 항구인 잠언 1장에 닻을 내리려 합니다. 1장은 전체 잠언의 서론이자, 우리가 왜 지혜를 구해야 하며, 수많은 유혹과 목소리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하는지, 그리고 거리에서 외치는 지혜의 음성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서곡입니다.
트렘퍼 롱맨과 같은 학자들이 강조하듯, 잠언은 학문적이고 신학적이면서도 지극히 목회적이고 실천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대적 일상, 가정, 그리고 직장 생활 속에서 어떻게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는지, 한 걸음씩 깊이 있는 탐험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
6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장의 첫 일곱 구절은 이 책이 쓰인 목적과 방향성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웅장한 선언문과 같습니다. 저자인 솔로몬은 독자들에게 이 책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얻게 될 엄청난 영적 유익들을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내듯 열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언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히브리어 단어들의 깊은 의미를 명확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학적 지식의 습득을 넘어, 고대 히브리인들이 하나님과 세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 사유의 틀을 들여다보는 중요한 창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혜의 어휘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가슴과 태도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7절을 통해 이 모든 지혜의 여정의 궁극적인 종착지이자 출발점을 장엄하게 선언합니다.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영적 중력입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일상 속에서 너무나도 많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투자한 자산의 가치가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고, 치열한 직장 내 경쟁에서 밀려날까 봐 두려워하며, 남들이 다 하는 것을 나만 하지 못하고 뒤처질까 봐 불안해하는 포모 증후군에 시달립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에 짓눌려 살아갑니다.
그러나 잠언은 우리에게 매우 유쾌하면서도 날카로운 역설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가장 크고 절대적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히 두려워할 때, 즉 경외할 때, 비로소 세상의 모든 자잘하고 헛된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피곤하고 꼬이는 이유는 우리가 엉뚱한 것들을 두려워하고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지혜의 문은 나의 얄팍한 지식과 스펙을 의지하던 교만을 버리고, 나를 지으신 창조주의 섭리 앞에 무릎을 꿇는 바로 그 겸손의 순간에 활짝 열립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그리고 그분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심장 박동과도 같습니다.
8 내 아들아 네 아버지의 타이르는 말을 귀담아 듣고 네 어머니의 가르침을 거부하지 말아라.
9 그들의 가르침이 면류관이나 훈장처럼 네게 영예와 존귀를 가져다 줄 것이다.
10 내 아들아 죄인들이 너를 꾀더라도 그들의 꾐에 넘어가지 말아라.
11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와 함께 가서 길목에 숨어 기다리다가 이유를 따지지 말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자.
12 스올처럼 그들을 산 채로 삼키고 무덤이 무고한 사람을 통째로 삼키듯이 그들을 통째로 삼키자.
13 우리는 온갖 값진 것을 얻을 것이며 빼앗은 물건으로 우리의 집을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다.
14 너도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아 우리가 가진 것을 똑같이 나누어 가지자.”
15 내 아들아 너는 그들과 함께 다니지 말고 그들의 길에는 발도 들여놓지 말아라.
16 그들의 발은 악을 향해 달려가고 그들은 피 흘리는 일을 서두르기 때문이다.
17 새들이 보는 앞에서 그물을 치는 것은 헛수고 아니겠는가!
18 그런데도 이들은 숨어서 기다리다 제 피를 흘리고 길목을 지키다 제 목숨을 잃는다.
19 부당한 이득을 좇는 사람이 걷는 길은 이와 같으니 그가 얻은 재물이 바로 그의 목숨을 앗아간다.
장엄한 서론이 끝나자마자 장면은 따뜻한 가정의 식탁으로 이동합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곁에 앉히고 다정하면서도 몹시 단호한 어조로 앞으로 다가올 거친 세상을 살아갈 준비를 시킵니다. 내 아들아 하고 부르는 이 부름 속에는 단순한 혈연관계를 넘어서서, 다음 세대가 생명의 길로 걸어가기를 애타게 바라는 지혜로운 스승의 간절한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점은 지혜의 교육이 성전이나 학교가 아니라 부모의 입술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가르침을 거부하지 말라는 8절의 말씀은, 부부의 연합을 통한 신앙의 전수가 자녀의 인격을 형성하는 가장 튼튼한 토대임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녀의 교육을 최고의 학원과 명성을 자랑하는 사교육 기관에 위탁하고 안심하곤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기술과 지식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영혼의 뼈대를 세우는 성경적 가치관은 부모의 눈물 어린 기도와 식탁에서의 대화를 통해서만 온전히 흘러갑니다. 그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명품, 즉 아름다운 화관과 금사슬이 되어 자녀의 인생에 참된 권위와 존귀함을 입혀줄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10절부터 아버지는 아들이 세상에 나가 직면하게 될 가장 현실적이고 치명적인 위협에 대해 경고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또래 집단의 압력과 부당한 이익을 향한 탐욕입니다.
11절에서 14절에 등장하는 악인들의 유혹을 가만히 보십시오. 그들은 마치 친한 친구처럼 다가와 이렇게 속삭입니다. 우리와 함께 가자. 이번에 확실하게 한몫 잡을 기회가 있다. 우리가 얻은 것을 깔끔하게 똑같이 나누어 가지자. 이들은 혈기 왕성하고 소속감에 목마른 젊고 순진한 영혼에게 두 가지 거부하기 힘든 달콤한 미끼를 던집니다. 하나는 우리라는 울타리가 주는 소속감이고, 다른 하나는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빠르고 확실한 물질적 보상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며 나는 어두운 뒷골목에서 강도 짓이나 살인을 모의하는 조직폭력배들과 어울린 적이 없으니 나와는 전혀 무관한 말씀이구나 하고 가볍게 넘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골목길에서 벌어지던 이 노골적인 강도 모의는, 오늘날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서 훨씬 더 세련되고 은밀한 방식으로 정장을 차려입은 채 벌어지고 있습니다.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회계 부정이나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불법적인 이익 챙기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또는 너한테만 은밀하게 알려주는 확실한 고급 정보인데 우리끼리만 공유해서 이번 기회에 크게 한 번 벌어보자며 부당한 투기나 탐욕적인 이익 구조에 동참하도록 부추기는 현대판 탐욕의 카르텔 역시 본문이 경고하는 악인들의 유혹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더 나아가 청소년과 청년들의 세계에서는 어떨까요? 단체 채팅방에서 누군가를 은밀히 따돌리거나 사이버 불링에 동참할 때, 거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무리에서 배척당할 것 같은 엄청난 압박감이 바로 이 유혹의 현대적 얼굴입니다.
그들은 함께하면 안전할 것이며 결과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17절에서 아주 위트 있으면서도 뼈 때리는 은유를 들어 그들의 무지를 폭로합니다. 새들이 보는 앞에서 그물을 치는 것은 헛수고 아니겠는가! 사냥꾼이 새를 잡으려고 그물을 치고 있는데, 그 모든 과정을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무리 지능이 낮은 미물이라도 뻔히 눈앞에 펼쳐진 죽음의 덫 안으로 스스로 날아 들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생존을 위한 이 정도의 본능적인 위험 감지 능력은 존재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지적하는 인간의 끔찍한 어리석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악인들은 자신이 친 탐욕의 그물에 결국 자기 자신이 걸려들어 치명적인 피를 흘리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그 파멸의 길을 향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미친 듯이 질주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욕망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시야를 가립니다. 죄는 우리에게 언제나 완벽한 충족과 즐거움을 약속하며 유혹하지만, 결국 그 끝에 배달되는 것은 영혼의 파산과 씻을 수 없는 수치뿐입니다.
19절의 결론은 너무나 냉엄합니다. 부당한 이득을 좇는 자의 길은 결국 그 얻은 재물이 자신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자멸의 길입니다. 탐욕으로 쌓아 올린 바벨탑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며, 스스로를 짓누르는 무덤이 되고 맙니다.
세상의 유혹이 거세게 찾아올 때, 친구들이나 동료들이 남들도 다 이렇게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데 너만 유별나게 왜 그러냐고 압박할 때, 우리는 부모님의 식탁에서 배웠던 이 지혜의 목소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다니지 말고 그들의 길에는 발도 들여놓지 말아라. 때로는 다수의 무리에 속하지 않아 겪어야 하는 고독과 불이익을 견뎌내는 것이, 거짓된 악의 무리에 속해 내 영혼을 파괴하는 것보다 백만 배는 더 위대한 승리임을 잠언은 우리 가슴에 깊이 새겨줍니다.
20 지혜가 거리에서 외치고 있다. 그 여인은 광장에서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21 여인은 복잡한 길 모퉁이에서 외치고 성문어귀에서 소리쳐 말한다.
22 “어수룩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어수룩한 것을 좋아하려느냐? 남을 비웃는 사람들은 언제까지 비웃기를 좋아하며 어리석은 사람들은 언제까지 지식을 미워하려느냐?
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켜라.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고 내 말을 너희에게 깨닫게 해 주겠다.
24 내가 불렀으나 너희는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내밀었으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25 너희는 내 모든 충고를 무시하고 내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6 그러므로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비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운 일이 닥칠 때에 내가 조롱할 것이다.
27 재앙이 폭풍처럼 너희를 덮치고 재난이 태풍처럼 너희에게 내리치며 근심과 고난이 너희에게 닥쳐올 때 28 그제서야 너희가 나를 부르겠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며 너희가 나를 찾아도 찾지 못할 것이다.
29 이것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두려워할 줄 모르며
30 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내 모든 책망을 업신여긴 까닭이다.
31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가 행한 일의 열매를 먹으며 너희가 꾸민 꾀의 결과로 배를 채울 것이다.
32 어수룩한 사람들은 내게서 등을 돌리다 죽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안일하게 지내다 망할 것이다.
33 그러나 내 말을 듣는 사람은 안전하게 살 것이며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는 일 없이 평안할 것이다.”
잠언 1장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장면은 고요하고 사적인 가정의 테두리를 벗어나 복잡하고 시끌벅적한 도시의 한가운데로 극적으로 전환됩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역동적이고 매혹적인 은유 중 하나인 지혜의 여인이 무대 중앙에 등장합니다.
히브리어로 지혜를 뜻하는 호크마가 문법적으로 여성 명사이기에 지혜가 여성으로 의인화된 자연스러운 언어적 배경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는 이후 잠언 7장과 9장에 등장하여 젊은이들을 죽음의 함정으로 유혹하는 파멸의 상징인 음녀와 극적이고도 선명한 대조를 이루기 위해 고안된 탁월한 문학적 장치입니다.
지혜의 여인은 고대 이집트의 정의의 여신인 마아트와 같은 이방 종교의 신이 결코 아닙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부여하신 신성한 질서이며, 멸망해 가는 세상을 향해 생명과 구원의 길로 돌아오라고 애타게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육성, 즉 거룩한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가 의인화된 아름다운 형상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포인트는 지혜가 서서 외치는 장소입니다. 그녀는 고립된 수도원의 골방이나 특정 계층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고급스러운 도서관, 혹은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에서 은밀하게 진리를 속삭이지 않습니다.
20절과 21절을 보면, 그녀는 붐비는 거리, 시끄러운 광장, 사람들의 삶이 치열하게 부딪히는 성문 어귀에서 소리를 높여 목놓아 외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성문은 재판이 열리는 법원이자 상인들이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며, 지역 사회의 모든 뉴스와 정보가 교환되는 커뮤니티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러한 지혜의 공공성이 현대인인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심장 떨리도록 명확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전이라는 종교적인 공간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지혜는 우리의 지극히 평범하고 세속적인 일상의 한가운데로 강력하게 침투해 들어옵니다.
지혜는 콩나물시루 같은 출근길 지옥철 안에서, 끝없이 쏟아지는 업무의 압박으로 숨이 막히는 사무실 책상 위에서, 퇴근 후 배우자와 감정적으로 충돌하는 거실 한가운데서, 심지어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치열한 육아의 현장 속에서 바로 우리 곁에 서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일상과 분리된 신앙, 삶의 현장과 동떨어진 영성은 잠언이 말하는 참된 지혜가 아닙니다.
그러나 가슴 아프게도 사람들은 이처럼 친실하고 간곡한 지혜의 부름을 철저히 외면합니다. 22절에서 지혜의 여인은 자신의 외침에 귀를 닫고 살아가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향해 탄식하며 질책합니다.
첫째는 어수룩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주관이 없고 유혹에 너무나 쉽게 넘어가는 얕은 생각의 소유자들입니다. 나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게으르고 생각이 없어서 죄의 그물망에 쉽게 걸려듭니다.
둘째는 남을 비웃는 사람들, 즉 거만한 조롱꾼들입니다. 이들은 냉소주의라는 갑옷을 입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현대 사회로 치면 인터넷 기사나 소셜 미디어에서 타인을 깎아내리고 악플을 달며 지적 우월감에 빠져 있는 익명성 뒤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든 것에 대해 논평하지만, 정작 자신의 영혼은 철저히 썩어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셋째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지식과 교훈 자체를 혐오하고, 자신이 아는 좁은 세계관만을 맹신하는 완고한 자들입니다.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완벽하게 차단해버린 닫힌 마음의 소유자들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현대의 차량 내비게이션 시스템에 비유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 절벽을 향해 달려가는 파멸의 길로 접어들 때, 지혜의 여인은 마치 내비게이션처럼 끊임없이 우리에게 경고음을 울립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다시 계산합니다. 전방에 위험 구간입니다.
23절에서 지혜는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켜라, 즉 회개의 유턴을 하라며 간곡히 초청합니다. 그렇게 돌이키면 내 영을 부어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겠다는 놀라운 은혜를 약속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교만함은 이 생명의 내비게이션을 음소거 해버리거나 아예 전원을 뽑아버립니다.
내가 수십 년을 운전했는데 기계 따위가 감히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느냐며 호기롭게 고집을 부리고 가속 페달을 밟습니다. 내 경험과 내 직감이 맞다는 오만함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27절의 묘사처럼 폭풍 같은 재앙과 근심이 삶을 덮칠 때, 차가 절벽으로 굴러떨어지며 처참하게 박살이 날 때, 그제야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내비게이션을 찾지만 그때는 이미 모든 기회가 사라져버린 후라는 것입니다. 지혜를 멸시한 대가는 이처럼 혹독합니다.
여기서 많은 독자들을 다소 당혹스럽게 만드는 구절이 하나 등장합니다. 26절을 보면, 사람들이 재앙을 당할 때 지혜가 비웃을 것이며 두려운 일이 닥칠 때 조롱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불행을 보며 잔인하게 쾌감을 느끼고 고소해하신다는 의미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비웃음은 창조주의 질서를 우습게 여기고 스스로를 내 인생의 하나님이라 착각했던 인간의 교만이 붕괴되는 그 순간에 나타나는 우주적 모순에 대한 탄식이자, 악의 허망함에 대한 냉엄한 선언입니다.
작은 손바닥으로 거대한 태양을 가리려 했던 인간의 어리석음이 마침내 그 알량한 실체를 드러낼 때,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코미디였는지가 온 우주에 명백하게 폭로되는 것입니다. 이는 죄악에 빠진 영혼이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극단적인 경고의 언어이지, 파멸 자체를 즐기시는 가학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마침내 지혜의 여인은 혼돈과 심판의 경고 속에서도 하나의 찬란한 약속, 가장 위대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며 1장을 마무리합니다. 33절의 선언입니다. 그러나 내 말을 듣는 사람은 안전하게 살 것이며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는 일 없이 평안할 것이다.
인생의 거친 비바람과 재앙의 폭풍이 몰아치는 날, 우리가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는 결코 내 통장의 두둑한 잔고도, 내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화려한 인맥이나 사회적 지위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일상의 거리에서 나를 향해 쉼 없이 소리치시는 지혜의 음성, 즉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다스림 안으로 피하는 것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이 결코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완전한 평안과 안전, 그 깊은 샬롬 속에서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함께 말씀을 나누는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잠언 1장의 깊고 풍성한 말씀을 통해 진정한 지혜가 무엇인지, 파멸을 부르는 유혹의 무리를 어떻게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는지, 그리고 붐비는 일상의 거리에서 애타게 외치는 지혜의 여인에게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이 위대한 지혜 문학을 성경 해석학적 원리에 따라 바르게 읽어내기 위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핵심이 있습니다. 잠언을 단지 세상을 요령 있게 살아가는 처세술의 모음이나, 내가 지켜내야 할 팍팍한 도덕적 율법으로만 읽는다면, 우리는 성경이 주고자 하는 생명의 절반도 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잠언의 가르침이 가리키고 있는 궁극적인 실체는 과연 누구이십니까? 신약성경의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 이 놀라운 비밀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또한 골로새서 2장 3절은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잠언 1장 20절에서 번잡한 거리 한가운데 서서 목소리를 높여 애타게 영혼들을 부르던 지혜의 여인은, 훗날 십자가라는 가장 처절한 거리, 갈보리 언덕 위에서 두 팔을 넓게 벌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외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온전하고도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세상의 오만한 눈에는 그 십자가가 가장 어리석고 무력한 실패작처럼 보였지만, 그것이야말로 멸망의 늪에 빠진 우리를 건져내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위대하고 완벽한 지혜였습니다.
진정한 지혜는 어떤 추상적인 원리나 사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지혜는 살아계신 인격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얻는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흠결 없는 완벽한 삶을 살아내려고 내 힘과 의지로 발버둥 치는 피곤한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참된 지혜의 길은 매 순간 나의 근원적인 한계와 어리석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나의 참된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깊고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그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혜가 되시는 그분 안에 머물 때, 우리는 또래 집단의 교묘한 압력과 세상의 헛된 탐욕의 그물을 넉넉히 끊어내고 뛰어넘을 수 있는 통찰력과 하늘의 명철을 공급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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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평생의 심비에 새겨야 할 잠언 1장의 두 기둥이 되는 핵심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7)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잠언 1:33)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저희를 고아처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영혼의 캄캄한 밤을 밝히는 생명의 나침반인 지혜의 말씀을 허락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돌아볼 때,
때로는 저희가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 사람들의 얄팍한 시선과 세상의 유행을 더 두려워하였고, 넓고 편해 보이는 유혹의 길에 휩쓸려 헛된 것을 좇았음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마치 오류를 바로잡으려는 내비게이션처럼 끊임없이 저희를 부르시며 바른길로 인도하시려는 지혜의 음성을 귀찮고 불편하다 여겨 전원을 꺼버린 채, 스스로 파멸의 절벽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아대던 우리의 치명적인 교만과 어리석음을 이 시간 십자가의 보혈로 덮어 주시고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간절히 구하옵기는 저희의 굳어버린 심령에 듣는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옵소서.
지혜의 근본이시며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희의 평범한 일상과 가정, 직장의 모든 영역을 온전히 다스리게 하시고, 세상의 그 어떤 달콤한 유혹이나 압력 앞에서도 단호히 아니요라고 말하며 거절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불안과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번져가는 이 시대 속에서, 오직 주님의 말씀에 청종함으로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 없이 안전하게 거하는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지혜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제 진리의 말씀을 품고 유혹과 혼돈이 가득한 세상의 거리를 향해 담대히 걸어 나가는 여러분을 향해 하늘의 크신 복을 선언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내딛는 삶의 모든 발걸음 위에 하늘의 지혜와 명철을 폭포수처럼 풍성하게 부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어리석음의 유혹이 은밀하게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릴 때마다,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단호한 용기와 능력으로 그 모든 덫을 끊어내고 넉넉히 승리하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가정과 치열한 직장, 그리고 매일 마주하는 일상의 모든 순간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찬란한 빛으로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의 헛된 두려움과 근심의 사슬에서 벗어나, 오직 주님이 친히 덮어주시는 흔들리지 않는 샬롬의 평강 안에서 오늘 하루도 참된 자유와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며 안전하게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