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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첫사랑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내 겨울 한가운데에 있었다.

by 김하루

내 첫사랑 그녀를 보았다. (첫사랑 그의 시점)


마트로 향하는 길,

햇살은 밝았지만 공기는 차가운 겨울이었다.

창문을 스치는 바람은 건조했고, 도로 가장자리에는 녹지 못한 눈이 희끗이 남아 있었다.


“성민오빠야, 나 춥다. 아, 그리고 우리 강아지들 간식 다 떨어졌지? 오늘은 꼭 사야 돼.”

여동생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차 안에는 귤껍질 냄새와 겨울 햇빛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우리는 결혼도, 아이도 계획이 없는 싱글 남매다.

누군가에게는 외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 -어머니, 여동생, 그리고 -이렇게 살아온 것이 익숙하고 편했다.


어머니는 혼자서 우리를 키워내셨다.

그 세월의 무게를 알기에,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뼈저리게 보고 자라온 탓에

결혼이라는 말은 왠지 마음에 닿지 않았다.

그냥 지금처럼 적당히 벌고, 적당히 웃고,

오순도순 서로의 일상을 나누며 사는 게 가장 좋았다.


고생 끝에 셋이 힘을 모아

기적처럼 작은 아파트를 장만했을 때,

어머니는 눈시울을 붉히며 내 손을 꼭 잡으셨다.

그리고 여동생과 내가 결혼과 아이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인 마음이 없다는 걸 인정하셨는지,

언제부터인가는 결혼하라는 잔소리 대신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조용히 내 이름을 기도에 올리셨다.

그 기도의 내용은 어머니만 아시는 비밀이다.


차에 히터를 켜자 조금씩 체온이 올라왔다.

나는 추운 것보다 더운 게 더 싫다.

히터 바람을 동생 쪽으로 휙 돌리자,


“역시 우리 성민오빠는 배려심이 좋다니까. 나 추웠는데 속상했어? 헤헤, 너무 따뜻하다.”


동생은 애교를 부리며 집에서 타온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차창 밖으로 오후 햇살이 기울며

도로 위를 금빛으로 덮어갔다.

멀리 신호등이 깜빡이고, 붉은 점멸등 사이로

사람들의 겨울 코트가 느릿하게 흔들렸다.


마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장바구니를 꺼낸 뒤,

철제 캐리어를 밀며, 머리를 안 감았는지 모자를 푹 눌러쓴 동생과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동생과 나는 네 살 차이지만, 누가 보면 딱 신혼부부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이미 신경 쓰지 않은 지 오래라, 나는 카트를 밀고

동생은 지나가는 거울마다 자신을 비춰보며

“살이 쪘네, 늙었네.”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이것저것 물건을 살피며

원재료명을 꼼꼼히 확인하는 소소한 즐거움에 빠져

쇼핑의 맛에 점점 힐링이 되고 있었다.




힐링의 순간을 역시 여동생이 흔들어 깨운다.

맛있는 저녁을 해 달라고 징징거리고,

집안 음식 담당인 내가 추운 날씨에 어울리는 칼칼한 음식을 해줄 생각이다.

혹시 너무 맵게 요리할까 벌써 걱정인지, 여동생은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시끄러운 소리가 듣기 싫어 애써 웃으며, 동생의 모자를 꾹 눌러 얼굴을 덮어버렸다.


프리랜서로 목수 일을 하는 나는,

쉬는 날이면 찌뿌둥한 근육통과 스트레스를 씻어내기 위해 영화를 보며, 맥주 한 잔을 즐기는 시간이 가장 평화롭다.

맥주와 강아지 간식만 사서 빨리 소파에 앉고 싶은 마음에 동생에게 서둘러 말했다.


“맥주 한 캔씩 마시면서 영화 한 편 보자. 애들 간식도 좀 보고...”


카트를 돌리는 순간,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내 스무 살 첫사랑, 지연이었다.

요즘 피곤해서 헛것을 본 것인가 싶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떴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 앞에 서 있었다.


갸름한 얼굴, 도톰한 입술, 동그랗고 큰 눈, 작은 코.

어렸을 적 풋풋했던 얼굴이 거의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똑 단발에 핑크색 립스틱을 하고 다녔던 그녀가 머리를 묶고 입술엔 립스틱을 바르지 않았으며, 배가 많이 나온 정도였다.


'아, 지연이다. 여전히 예쁘다. 그런데 배가... 아기를 가졌나?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나?’

나는 갑자기 반가움과 슬픔이 몰아쳤다.


그녀는 예전처럼 날 떠나듯 뒤돌아가 버렸다.

예전에도 난 그녀를 잡을 수 없었고,

또, 오랫동안 가끔 용기를 내 그녀를 따라가 잡는 상상을 해봤지만, 후회와 고통으로 아플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만약 지금 그녀가 임산부가 아니었다면, 당장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고, 왜 떠났냐고 묻고 싶었다.


남자에게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은

오랫동안 환상과 고통 그 자체다.


재촉하는 동생을 따라 정신이 멍해진 채,

나도 모르게 맥주 대신 안 마시던 소주 두 병을 손에 쥐었다.


“오빠, 소주 안 마시잖아? 갑자기 왜 두 병씩이나 사는 거야? 성민오빠, 정신 차려!”


동생이 내 등을 툭툭 두드리자 나는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흔들었다.


“가자.”


성민오빠, 애들 간식은? 사료도 사야 해. 갑자기 왜 그래?”


나는 정신이 나간 채로 카트를 끌고 계산대로 향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십몇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리워했던 그녀를 이제야 만났다는 게 너무 억울하고 슬퍼서 눈시울이 젖었다.

그런데 뒤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이 이상하게 애틋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여전히 내 겨울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 글은 훗날 내가 들은 그의 그날의 감정을 담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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