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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카혼타스 Oct 22. 2023

언니가 '당진'을 써주면 좋겠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 배지영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 항상 잠깐씩 고민한다. 어릴 적에는 나고 자란 곳이 달라서 그랬고, 직장을 옮기면서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와 17년째 살고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부모님은 고향이 같다. 나는 두 분의 고향인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첫 아이였던 나는 미처 병원에 갈 새도 없이 할머니 집 작은방에서 세상으로 나왔다고 한다. 내가 돌 되기 전에 우리 세 가족은 경주로 이사했다. 

학창 시절에는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보다는 엄마가 서울사람이냐는 질문을 더 많이 받았다. 친구와 만나기 위해서는 집 전화로 약속을 잡아야 하는 시절이었다. 수화기 너머 엄마의 나긋나긋한 충청도 말투가 경상도 엄마를 둔 아이들에게는 서울말로 들렸나 보다. 40년 넘게 경주에서 살고 있는 두 분의 말투에는 여전히 경상도 억양이 없다. 부모님은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바로 ‘당진’이라고 답할 것이다.

말투도 고향도 정체성이 명확한 부모님과 달리 나는 뭔가 애매하다. 충청도에서 나서 경상도에서 자라고 수도권을 거쳐 다시 충청도에서 직장생활 중인 나는, 충청도 말도 아니고 경상도 말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한 표준말도 아닌 애매한 말투를 쓴다. 

첫 직장을 정리하고 두 번째 직장을 당진으로 옮겼을 때 부모님이 많이 좋아하셨다. 부모님의 바람대로 이곳에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정착해서 살고 있다. 조기 퇴직과 이주를 항상 바라고 있기는 하지만.

사회에서 예전보다 학연, 지연이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첫 입사 때나 부서를 옮길 때, 첫 대면에는 여전히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눈치껏 ‘당진’이라고 대답하지만 이어지는 다음 질문에서 다시 막히고 만다.

“그럼 고등학교는 어디 나왔어? 당진고? 호서고?”

나는 경주여고를 졸업했다. 

여전히 여기는 지역사회구나 싶어 서운할 때가 가끔 있지만, 요즘은 타 지역 출신 신규직원들도 많아지고, 또 개인 신상 관련 질문을 서로 삼가는 분위기여서 예전만큼 많이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어느 북토크에서 배지영 작가를 알게 되었다. 군산 ‘한길문고’ 상주 작가라고 했다. 북토크 주제도 동네서점이었고, 그 후에 다른 책을 더 읽어보니 지역 이야기를 유독 많이 쓰는 작가였다. 특히 ≪군산≫을 읽고 나서는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를 모두 찾아 읽고 싶을 정도로 관심이 생겼다.

책을 쓰면서 만난 군산 사람들에게 인터넷 검색을 해도 나오지 않는 옛날 일을 물으면 이야기를 늘어놓는 끝에 군산사람 아니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고 한다. ‘군산에서 태어나고 자라지는 않았지만, 19살에 군산에 와서 애들은 군산에서 낳고 키웠으니 군산사람이긴 하다’고 대답했던 작가는 ≪군산≫ 서문의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군산에서 서른 번째 봄을 맞은 해대한민국 도슨트 <군산이야기를 쓴 나는 군산사람이다.      

 

군산은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여행지다. ≪군산≫을 읽기 전에는 다른 보통의 여행자들과 비슷했다. 처음에는 더 먼 여행지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짬뽕을 먹기 위해 잠깐 들렀고, 두 번째는 당일치기 여행이었다. 철길에 아이들을 세워놓고 사진을 찍고, 근대역사박물관을 구경했다.

지난여름, 서천에서 캠핑 중이었다. 어렵게 예약에 성공하고 몇 달을 기다린 바다 전망 명당자리였다. 가기 전부터 비 예보가 있어 걱정이었는데 둘째 날이 되니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우중 캠핑은 어느 정도 견디며 즐길 수 있는 경지였지만, 바닷바람은 생각보다 더 매서웠다. 철수를 결정하고 급하게 하룻밤 묵을 숙소를 찾던 중 갑자기 군산이 떠올랐다. ≪군산≫을 읽은 후 제대로 여행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다행히 캠핑장에서 차로 15분 거리 숙소에 방이 있었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이 내려다보이는 게스트하우스였다. 비 내리는 일요일 오후 군산은 한산했다. 계획에 없던 여행이었지만 모든 게 좋았다.

우산을 쓰고 동네를 산책했다. 문구점에 들러 뽑기도 하고 옷가게와 책방에는 잠깐 들어가 구경도 하면서 다니다 보니 초원사진관이 나왔다. 남편과 나는 어느새 길에 선 채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장면을 아이들에게 설명하느라 열심이었다. 정작 아이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이성당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 거냐며 재촉할 뿐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우리가 같이 걸었던 군산 거리를 배경으로 한 그 영화를 아이들과 함께 다시 봐야겠다고 남편도 나도 생각했다.

다음 날이 월요일이어서 근대 역사투어를 못한 점은 언뜻 아쉬움처럼 보이나 다음 여행을 기약하는 마땅한 사유가 되기도 한다. 이미 책을 읽을 때 군산 도슨트가 소개한 28곳은 꼭 다 가보겠다 마음먹었으니. 

당진에 산 지는 꽤 오래지만 아직 이곳이 너무 좋지는 않다. 전보다 많이 발전해서 처음 왔을 때의 황량함은 거의 없지만, 또 어느 몇 장소는 몹시 좋아하기도 하지만 아직은 조금 부족하다. 최근 들어 방송에도 많이 소개되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핫하다는 소식이 들리면 반갑기는 하다. ‘거기가 좀 예쁘기는 하지. 대체 어떻게 알고 오는 거야’ 싶은 마음에 좀 으쓱하기도 한다.       

21세기 북스의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는 현재 9권이 출간됐다. 독립된 시․군 단위를 각각 한 권의 책으로 묶어 각 지역의 고유한 특징을 깊이 있게 담아낸다 했으니, 언젠가는 ‘당진’이나 ‘경주’도 나오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친한 직원들과 이야기하는 중에 우연히 둘 다 당진 토박이임을 알게 됐다. 두 사람이 다녔던 중학교를 지금 딸아이가 다니고 있다. 옛날 학교 다닐 적 이야기하는 것을 한참 듣다 보니 지금과는 주변 환경이 많이 달랐음을 알 수 있었다. 한번 터진 옛 추억 이야기는 점점 더 옛날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부모님부터, 어쩌면 더 선대부터 쭉 당진에서 살고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옛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중 한 명은 건축 전공자다.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몇 년째 당진 이곳저곳을 그림으로 남기고 있다. 개인 블로그에는 드로잉 하나마다 짤막한 글이 함께 달려있다. 블로그명과 동일한 제목으로 ‘당진건축유산 그림여행’이라는 책을 내는 게 꿈이자 목표라고 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무작정 ≪군산≫을 들고 찾아갔다.

“언니가 ‘당진’을 써주면 좋겠어!”   

후에 알게 됐지만 사실 그가 구상 중인 책은 드로잉이 주인공이었다. 그림으로 못다 한 이야기를 수채화 같은 글로 채우고 싶다고 했다. 뜬금없이 건네받은 책을 읽고서는 ‘얘가 참 나를 과대평가하는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저렇게 긴 글은 절대 못 쓴다는 말도 덧붙였다.

드로잉으로 넘쳐났던 그의 블로그에서 요즘 들어 글 쓰는 사람의 향기가 물씬 나는 것을 보면 뿌듯하고 기대가 된다. 글과 그림이 어우러지는 책을 쓰기 위해서, 건축물 드로잉에 작가의 사유와 철학을 담기 위해서, 결국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노력하는 게 보인다. 당진의 역사와 이야기를 담은 좋은 책이 곧 나올 것만 같아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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