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것만으로 충분해진 시간
성산이는 보더콜리이다.
보더콜리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엄청 운동량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보더콜리뿐 아니라 반려견에 대해 아무 이해도 없는 채 성산이를 데려왔다.
얼마나 자라는지, 강아지 성격은 어떤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다만 작은 공간에서 사람이 반가워 오줌을 지리던 그 강아지를 도저히 두고 올 수 없었다.
모든 게 물음표였다.
그러다가 인터넷을 찾아보다가 알았다. 어릴 적 호주에서 양을 몰던 개를 본 적이 있는데 그 개가 바로 이 보더콜리였다는 걸. 그렇게 우당탕탕 ‘성산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성산이는 단순한 산책만으로는 부족했다. 원반이나 공 같은 도구로 신나게 뛰어놀아야 집에서 얌전히 쉴 수 있었다.
덕분에 ‘굳이 왜 올라가야 하지?’ 했던 산이 필수 코스가 되었다. 평지 산책만으로는 에너지가 채워지지 않으니, 동네 뒷산이라도 다녀와야 집에서 내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성산이에게 산책은 외출 전이든 출근 전이든 빠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정작 산책을 즐기지 못했던 것 같다. 풍경을 보고 여유를 느끼기보다는 성산이의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데 급급했다.
직장을 다니게 된 뒤에는 평일에 줄어든 산책량을 채워주기에 바빴다. 나에 산책은 말 그대로 ‘의무’였다.
산책 사진도 찍고 얼마나 걸었는지도 측정했다.
그러다 어느 날, 성산이가 아홉 살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열심히 걷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문득 깨달았다.
내가 편해졌다는 사실을.
시간 체크도, 핸드폰 확인도 없이 그저 같이 걷고 있었다. 보더콜리와 함께한 지 10년, 산책은 더 이상 숙제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스며든 일상이 되었다.
이제 나는 산책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바람 냄새를 맡고, 두 발로 걷는 그 자체를 즐긴다. 성산이와 나의 속도가 서서히 맞춰지면서, 서로 편해진 산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엔 원반을 하러 간다거나 목적이 있는 걸음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걷는 걸 즐기는 길이 되었다.
성산이가 나이 들어가며 속도를 맞춰주듯, 나도 그 곁에서 여유를 배우고 있다.
함께 늙어가는 일에 이렇게 큰 위로가 숨어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것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