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로 본 양심의 무게와 그 중요성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by 윤선하


이 작품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러시아인의 일반적인 특성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그리는 까라마조프 가문에 대한 대서사이다. 까라마조프 가문은 다소 정도가 덜한 알료사를 제외하고는 극단적이고 격정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행동과 감정이 급격히 변하는 모순적 특성을 보인다. 특히 약혼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구애하면서 돈을 유흥비로 탕진하고 아버지와 갈등하는 드미트리나 형의 약혼녀를 사랑하면서 내심 아버지의 죽음을 바란 이반은 까라마조프 가문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소설은 이들의 이런 복잡한 성격을 ‘까라마조프 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특성은 사실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우리 모두 까라마조프 가문의 사람들처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선과 악을 넘나드는 모순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책의 분량은 거대하지만 이 많은 내용을 선과 악에 대한 인간의 양심, 카라마카프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의 고안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이반은 무신론자로서 신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신이 없다면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 신은 인간들의 행동을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대심문관’이기 때문이다. 대심문관으로서의 신이 존재한다면 그의 판단을 두려워해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제약하게 되겠지만 신이 없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반이 생각하는 신은 사실 본인의 양심이다. 그의 양심은 이미 스스로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분하고 있다. 스메르자코프와의 세 번째 만남에서 그의 말이 이를 대변한다. “그래, 난 그때 그걸 기대했었어. 그건 살인이야! 나는 살인을, 바로 살인을 원했던거야!” 이반은 자신이 아버지 표도르의 죽음을 내심 기대한 것이 살인범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살인범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가 죄에 대한 의도만으로 죄의식으로 고통 받는 모습은 신의 존재 여부와 관계 없이 그의 내면에 자리한 양심이 스스로의 행동을 제약하고 판단하는 것을 의미 한다.




신과 인간의 양심에 대한 얘기는 대심문관 편에서도 언급된다. 예수그리스도가 민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자 이를 본 대심문관이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하라고 명령하고 가둔다. 그러고선 오늘날의 인간들은 노예와도 같아 자유를 부담스러워하고 그런 나머지 사제들에게 스스로 자신들의 자유를 공손히 바쳤다고 선포한다. 그러면서 이 돌멩이를 빵으로 한번 변화시켜 그 빵을 저 불쌍하고 비천한 인간들에게 주면 양떼처럼 그리스도를 따를 거라고 한다. 이는 자신의 양심과 그에 따를 자유를 감옥에 가두어 버린 대심문관이 인간 본질 양심이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나머지 민중들마저 사악한 피조물로 간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가시적인 것을 얻고자 그것들을 양심과 맞바꾼 것이다. 대심문관을 보며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자신의 욕망을 못 이겨 양심을 버린 사람이 이정도로 비열하고 악을 행하면서 떳떳할 수 있구나’이고 다른 하나는 ‘속세적이고 욕망적인 것과 양심을 따르는 자유, 이렇게 둘 중 선택해야 한다면 양심의 무게가 클 수밖에 없구나’에 관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겐 양심을 따라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싶은 자신에 대한 의리가 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양심을 지켜야하는 무게 또한 있다. 이반은 욕망의 감정에 치중한 나머지 그 양심의 무게가 자신의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그 책임을 신에게 떠맡긴다. 하지만 추후 죄의식에 몸부림을 치면서 자신이 자기스스로의 판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반과 같은 경우는 그래도 다행이다. 죄의식이라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늦게나마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심문관의 경우엔 양심의 목소리를 애초에 감옥에 가두었고 이는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대심문관 아래에 있는 민중의 수가 많은 만큼 그에 대한 대가는 사회 전역의 문제로 퍼진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그는 그의 지휘 하에 있는 모든 민중들을 양심을 저버린 개, 돼지로 취급하며 그들에겐 양심과 자유를 따를 권리조차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 그 대심문관의 후예들은 현재에도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있다. 그들이 자신의 양심을 끝까지 얘기하지 않는다면 말하게 해야 된다. 소설 속의 민중들처럼 무력하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면 안된다. 그게 우리 민중의 힘이고 민중의 권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양심의 무게를 좀 더 무겁게 할 순 없을까 의문이 든다. 내가 양심을 지키고 자유로울 권리에서 스스로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양심이란 결국 선과 악 그 사이에서 고뇌하고 번뇌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양심이란 개인적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발현되고 기능하기 쉽다. 이반의 경우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커진 상황에서 그의 살인을 원했고 대심문관 또한 민중에 대한 돌봄보다는 개인적 욕망이 더 커진 상태에서 악을 행했다. 나는 이것이 그들에게 사랑하는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반은 아버지의 고약함과 비열한 삶을 용서하고 인내할 수 있는 힘이 부재했고 대심문관 또한 자신의 욕망을 희생하고 민중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자 한 사랑이 없었다. 그 사랑의 부재는 이반으로 하여금 아버지 표도르를 향한 증오와 불만을 극대화했으며 대심문관이 스스로 더 교만해지고 민중과 자신을 단절시키게 만들었다. 즉 사랑의 부재 상태에서 악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악은 반대로 사랑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사실 마음이 사랑과 선으로 가득 차있다면 양심은 그 기능이 별로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양심은 악이 치닫는 그 마지막 순간에 선을 대변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인간의 보편적 감정과 선과 악, 양심의 소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봤다. 극단으로 치닫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관찰하면서 내면의 양심이 그들을 극단의 상황에서 어떻게 보호하는지, 혹은 그 부재가 어떤 파국을 낳는지 볼 수 있었고 이로써 내면에 항상 선과 사랑을 담고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 살아야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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