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치어의 바다 - 7
코란의 기도가 지지직거리는 주파수 소음과 함께 열린 창으로 흘러든다. 이슬람권으로 넘어오고서부터는 이 기도 방송이 매일의 기상송이다.
어제 잠수복 환복이 너무 스트레스라며 울던 해원 언니는 초췌한 얼굴로 자고 있다. 나는 잠이 덜 깬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먼바다의 파도가 일으키는 포말이 또렷이 보인다. 오늘은 바람이 제법 거세려나 보다.
“구명조끼 없이 가능할까……?”
멍하니 혼잣말을 하자, 조리대에서 라면을 끓이던 태윤이 이쪽을 본다.
“수영할 줄 모른다며. 괜한 짓 마라.”
“구명조끼 입으면 잠수 못하지?”
“당연한 걸 와 묻노. 잠수가 하고 싶으면 스쿠버 다이빙을 배워라.”
“됐어. 어제 해원 언니 안 봤냐? 얼마나 싫으면 울겠어.”
“그건 저 누나가 이상한 거고. 그까짓 게 뭐라고 울긴 와 우노.”
태윤은 며칠 해원 언니를 겪어보더니, 언니가 4차원계라고 확신하고 있다. 간혹 나도 서른을 넘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천진난만한 언니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긴 한다.
“아무튼 잘 생각해라. 오늘은 물에 들어가지 말고. 파도가 셀 거라더라. 그래서 우리도 강습 취소됐다.”
난 태윤 옆에서 슬그머니 라면 몇 젓가락을 얻어먹고는 바다가 보이는 외부 복도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구명조끼 없이 바다에 들어가다니, 역시 위험하다. 한국의 서해처럼 해변이 완만히 길게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동해만큼은 아니지만 여기도 제법 빠르게 가팔라진다. 구명조끼를 입건 아니건, 오늘은 아무래도 날이 아니다.
다시 침대에 들어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나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컴컴한 하늘을 보니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벌써 6일째다. 다하브의 어딘가에 시간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라도 있는 걸까?
바다에 들지 않는 하루는 지루하다. 번데기처럼 침대 위를 뒹굴다가 노트북을 열어 몇몇 사람들에게 메일을 보내고 전자책 리더기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이야기를 읽는 내내 어른거리던 설경은 사막의 나라에서 읽기엔 확실히 절묘한 데가 있다.
『천우학』까지 완독한 후에는 전자책 리더기를 껐다. 그리고 배낭을 뒤엎는 해원 언니 옆으로 갔다. 강습에 나가지 않은 언니도 종일 침대에서 뒹굴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나는 언니가 배낭에서 꺼내 침대 위에 나열한 물건들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웬 책 한 권에 시선이 꽂혔다.
“언니, 그 책 뭐야?”
“음? 뭐가?”
나는 손을 쭉 뻗어 언니 옆에 놓인 책을 가리켰다.
“저거 무슨 책이냐고.”
“아, 이거. <카미노 데 산티아고>에 대한 책.”
“카미노, 뭐?”
“카미노 데 산티아고.”
“그게 뭔데?”
“가톨릭 성지순례 길이야.”
성지순례길?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자세히 얘기해 봐.”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가는 길이야. 많이들 시작하는 출발지점은 프랑스의 생장 피드포르(St. Jean. Pied-de-port)라는 마을이지. 그 마을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는대.”
“걸어서?”
“응.”
“완주하는 데는 얼마나 걸려?”
“짧게는 20일 정도에서 길게는 40일도 넘게 걸리기도 하고. 사람마다 다르지 뭐.”
“중간중간 숙소는?”
“적정거리마다 알베르게라는 순례자 전용 숙소가 있대. 가격도 저렴한 편이고. 수도원이 운영하는 곳도 있고, 사설도 있고.”
“이 책 내가 읽어봐도 돼?”
“그러엄.”
해원 언니가 건넨 책의 앞표지엔 푸른 하늘을 향해 죽 뻗은 길이 프린트되어 있다.
나는 그 길을 잠시 보다가, 첫 장을 펼쳤다.
책은 단숨에 읽혔다. 한국에서 출발한 어느 여행자가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느꼈던 감상, 만났던 사람들의 사연, 산티아고의 역사에 대한 기록을 위주로 쓴 여행 에세이다.
마지막 장까지 읽기를 끝마치고 책을 덮었다. 책의 내용보다는 이 길 자체에 완전히 사로잡힌 기분이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생긴 기대감으로 마음이 수소 풍선 마냥 높이 높이 날아오른다. 만화책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떠오른다.
『사람은 언제고 반드시 행동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누군가에겐 이미 찾아온 순간일 수도 있고,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순간일 수도 있다. 단 한번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여러 번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내게는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는 강렬한 예감이 든다.
대개의 결심은 뭔가를 하면서 서서히 확고해지는 일이 많다. 창작에 대한 나의 결심이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가 오랜 시간에 걸쳐 단단해졌던 것처럼.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확 내리 꽂히듯 정해지는 결심도 있는 모양이다.
처음 겪는 일이라 스스로에게도 잘 설명할 수 없지만, 내가 반드시 지나야 하는 통과지점을 찾아낸 것 같다. 그간 정확히 어디로 가려는 줄도 모르고 헤매던 나에게 불쑥, 정말이지 불쑥, 하고 이정표가 등장했다.
같은 도미토리룸을 쓰는 식구들과 저녁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해원 언니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겠다는 내 계획을 이야기했다. 해원 언니가 반색하며 되묻는다.
“정말 너도 갈 거야?”
“응.”
“언제?”
“이집트 떠나면 바로.”
“비행기로?”
“아니. 중동 거쳐서 들어가는 육로로.”
해원 언니가 놀라 묻는다.
“비행기로 한 번에 가는 게 아니야? 위험할 텐데 굳이 중동을 거치려고?”
“지도 보니까 배로 요르단 들어가서 터키로 간 다음, 터키 통해서 유럽 대륙 관통하면 될 거 같아. 겸사겸사 거치는 나라들도 여행하고 좋지.”
해원 언니는 혀를 내두르면서도 나의 이 계획이 은근히 본인도 동한 눈치였다. 1년째 세계여행을 하다 슬슬 한국행을 준비 중인 태윤만은 ‘그럴 법한 루트네.’하는 기색이었다.
새로운 여정을 결정한 다음날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바다부터 보았다. 오늘은 파도의 흰 포말이 또렷하지 않다. 바람이 잠잠한가 보다. 햇살은 여느 때보다 더욱 선명하다. 바다 수영하기에 이보다 좋은 날씨가 있을까.
다이버 사무실에서 스노클링 장비를 꺼냈다. 걸려있는 구명조끼를 잠시 보다가 돌아서 나왔다.
몇 분 뒤 내가 선 곳은 늘 가던 등대 인근이 아닌 숙소 바로 앞의 해변이다. 이곳도 아주 얕은 편은 아니지만 경사가 완만하고 길다. 구명조끼 없는 바다수영을 위해 위험요소를 최대한 제거한 선택지다.
구명조끼 없이 바다에 들어가자 기분이 이상야릇하다. 두려우면서도 어쩐지 개운하다.
배부터 천천히 물에 몸을 담가본다. 금세 머리까지 잠긴다. 오늘따라 유난히 바닷속이 한층 투명해서 아주 멀리까지 훤히 보인다. 난 핀을 착용한 두 발을 바닥에서 떼며, 엎드리다시피 물에 몸을 띄웠다. 그 짧은 수 초 간 가슴이 방망이질 친다.
가능할까? 뜰까? 가라앉을까?
이런 모든 걱정이 우스울 만큼 몸은 간단히 물에 뜬다. 스노클이 물에 잠기지도 않는다. 몸이 가라앉을 기미가 느껴지면, 두 발과 양팔을 동시에 움직이면 그만이다. 구명조끼 없이도 몸이 가라앉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확인했을 때의 환희란……!
확신 위에 용기가 얹히자, 이제 좀 더 깊은 수심으로 나아가 본다. 핀의 추진력과 부력은 대단해서 순식간에 내 키를 넘는 깊이까지 도달한다. 다시 덮쳐온 본능적인 공포로 호흡이 가빠지려는 걸 있는 힘을 다해 다스린다.
겁먹을 것 없어. 두려워할 것 없어.
빠지지 않아. 아까도 빠지지 않았던 몸이 이제 와서 빠질 리 없어.
나를 믿자. 구명조끼를 벗어보기로 한 나를 믿자.
가쁜 호흡이 조금씩 안정된다. 나는 뻣뻣하게 긴장한 몸의 힘을 뺀다. 그때 저만치서 뭔가가 어른거린다. 지금 있는 곳보다 훨씬 깊은 곳이다. 조금 망설이다가 그곳으로 향한다. 어차피 여기나 저기나 발이 닿지 않기는 매한가지니까.
원하던 곳에 이르렀을 때, 나는 눈앞의 풍경에 온통 매료되고 만다. 치어 떼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물고기 떼가 햇빛이 투과한 물속에서 여유로이 군무를 춘다.
수억만 개의 비늘이 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인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뿌듯이 벅차오른다. 나는 가까이 헤엄쳐 치어 떼의 한복판으로 파고든다. 내가 접근하자 반으로 부드럽게 나뉘었던 그들이 곧장 내 뒤에서 합쳐져 군무를 이어간다.
나는 그들의 군무에 끼거나 주위를 돌며 함께 어우러진다. 머리 위에서는 환한 태양이 내리쬐고, 투명한 바다와 황금빛 모래가 나와 치어들을 품어 안는다.
아아. 행복하다.
어린 물고기들과 물속을 노니는 이 순간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하고 자유롭다. 스노클의 수경을 쓴 채인데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여기서 울면 큰일이야,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속으로 크게, 아주 크게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