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지구의 이방인들 - 2
다하브에서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함께 출발하는 나와 해원 언니는 꼭두새벽부터 분주히 짐을 꾸렸다. 오늘 우린 이집트를 떠난다. 여행을 시작한 지 수개월이 지난 내 배낭은 노트북을 제외하곤 마땅한 짐이랄 것도 없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기후가 계속 달라지는 바람에 도중에 주거나 버린 옷이 태반이다. 반면 해원 언니는 대형 배낭에 트렁크까지 챙기느라 두 배는 바쁘다. 언니를 보니 여행을 갓 시작했을 무렵의 내가 떠오른다.
우리는 오늘 요르단으로 간다.
다하브와 가까운 누웨바의 항구로 가면 요르단의 아카바로 떠나는 국제페리가 있다. 우린 그것을 탈 것이다.
태윤은 카이로에 볼 일이 있어 하루 먼저 다하브를 떠났다. 우리와는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재회할 예정이다.
아침 10시 무렵, 누웨바행 미니버스가 숙소 앞에 당도했다. 그동안 같이 지낸 도미토리 식구들, 숙소 직원들이 배웅을 나왔다. 제법 정이 들어서 헤어짐이 아쉽다. 숙소 주인은 우리에게 “인샬라.”라고 작별 인사를 건넸다. 숙소 식구들이 문 밖까지 나와 우릴 태우고 떠나는 미니버스 뒤꽁무니에 손을 흔들었다.
이집트에는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 기대보다는 실망이 더 컸던 나라지만, 그래도 알고 있다. 이 나라는 내게 평생 잊지 못할 크나큰 전환점이 되어준 곳임을.
누웨바에 도착하니, 시간이 벌써 11시 30분을 넘기고 있다. 페리는 12시에 누웨바 포트를 떠나니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우리는 곧장 페리 티켓 오피스로 달려갔다.
오피스에 앉아있던 코털이 무성한 남자가 여권과 티켓 값을 요구한다. 우린 가진 현금을 모두 털어 140달러와 여권을 건넸다. 그런데 여권을 뒤적거리던 남자가 툭 말한다.
“돈이 모자라요. 1인당 10달러씩 20달러!”
이건 뭔가 싶어 확 짜증이 치민다. 또 커미션 사기야? 정말 지긋지긋하다. 이놈의 악명 높은 이집트 바가지는 끝까지 우릴 골탕 먹이려는 건가.
“무슨 소리예요? 티켓 값은 두당 70달러잖아요.”
그러자 남자가 말했다.
“출국세.”
“뭐라고요?”
“출국세가 없잖아요.”
순간 머리가 띵하다. 나는 멍청하게 언니를 보았다. 언니가 불안한 표정으로 날 본다.
“왜?”
“출국세 내래. 출국세가 있었어?”
“뭐?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
낭패다. 가진 달러는 페리 비용에 딱 맞춘 금액이 전부다. 하필 여기엔 현금을 인출할 수 있는 ATM기도 없다!
“어떡해, 우리?”
나는 황급히 남자에게 물었다.
“이집트 파운드로도 지불할 수 있나요?”
“yes.”
우린 얼른 둘이 가지고 있는 이집트 파운드를 탈탈 털었다. 그러나 전부 합쳐도 한 사람 몫의 출국세를 간신히 넘긴다.
이집트에서의 마지막 날이랍시고 이집트 화폐는 어제 흥청망청 써버렸는데, 정말이지 후회막급이다. 해원 언니가 발을 동동 구르는 동안, 나는 주변을 살폈다.
마침 같은 버스를 타고 온 중국인 여자 두 명과 백인 남자 한 명이 있다. 동양 여자들은 먼저 티켓을 끊고 저희끼리 모국어로 대화 중이다. 나는 급히 그녀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실례해요. 혹시 저희에게 달러나 이집트 파운드 좀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 같은 페리를 타고 가니까, 요르단 도착하는 즉시 디나르로 환전해서 갚아 드릴게요.”
그러자 무연하던 여자들의 낯빛에 경계하는 기색이 어린다. 둘 중 짧은 머리에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말한다.
“잠깐만요. 둘이 상의를 좀 해볼게요.”
여자는 단발머리의 여자와 빠른 투로 대화를 한다. 나는 초조한 발을 동동 구르며 휴대폰 시계를 보았다. 앞으로 15분 후에는 배가 떠날 것이다. 오늘 요르단으로 가는 페리는 그 배 달랑 하나다.
대화를 끝낸 여자가 말했다.
“미안해요. 우린 빌려줄 수 없겠네요.”
눈앞이 아찔하다. 나는 통사정을 시작했다.
“안 드린다는 게 아니에요. 우린 그 돈이 없으면 오늘 이집트를 떠날 수 없어요. 하필 이 근처에는 ATM기도 없어서 현금을 인출할 수도 없고요. 꼭 두 분 도움이 필요해서 그래요.”
하지만 짧은 머리 여자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제 친구가 당신들의 뭘 믿고 돈을 빌려주겠냐고 하는군요.”
그 말을 듣자 받지도 못한 돈을 이미 떼먹은 사람이 된 것 같아 몹시 불쾌하다. 낯선 우리를 그들이 무턱대고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또 믿지 못할 건 또 뭔가?
게다가 고작 10달러도 채 안 되는 돈이다. 겨우 그 돈에 인간성까지 의심받을 일인가?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거든, 도망갈 데라곤 바다뿐인 페리 안에서 내내 같이 동행하면 될 텐데.
그렇지만 이런 생각도 내 입장일 뿐이다. 내가 그들에게 믿음을 맡겨놓은 양 당당히 요구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난 어째서 부지불식 간에 저들이 돈을 빌려주리라 여겼을까.
아마도 같은 동양인이라서?
같은 성별이라서?
여하간 단호한 두 여자 앞에서 대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당황해서 서있는데, 근처에서 우릴 보던 백인 남자가 말을 걸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순간 어떤 육감 같은 것이 번뜩이며 입에서 말이 술술 나온다.
“실은 우리가 출국세가 있는 줄 모르고 현금을 미리 준비해오지 못했어요. 이집트 파운드는 부족하고, 달러는 ATM에서 뽑아야 하는데 여기는 그게 없어요. 요르단에 도착하면 ATM을 발견하는 즉시 갚아드릴 게요. 그러니 부족한 만큼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노 프라블럼.”
빙긋 웃은 그가 흔쾌히 지갑을 열어 10달러 지폐를 내 손에 쥐어준다.
“……”
아니, 이게 이렇게 쉽게 된다고?
난 손 위에 놓인 10달러짜리 지폐를 멀거니 보았다.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데가. 그에 대한 감사가 왈칵 몰아친다.
나는 남자에게 연신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당신은 천사야!”라고 외치고는 냉큼 티켓을 끊었다. 해원 언니도 그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며 인사했다.
가까스로 수속을 마치고 항구 대기실로 들어갔다. 대기실은 넓고, 크고, 낡았다. 대기용 벤치 외에는 시설이랄 게 없어서 대형 컨테이너나 공장 창고 같다.
큰 고비(…)를 넘긴 우리는 대기실 구석 의자에 배낭을 내려놓고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출발 시간까지 5분 남았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했다.
“어떻게든 해결돼서 다행이네. 사실 나 오늘이 비자 만료일이거든.”
언니가 뒤늦게 기함할 말을 태평히도 한다.
대기실 안은 승객들로 꽉 차있다. 니캅이나, 차도르 혹은 히잡을 착용한 여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바닥에 신문지 따위를 깔고 앉아 있다. 아이들은 거의 맨발로 대기실을 이곳저곳 뛰어다닌다.
저 한가로운(?) 광경을 보고 있자니, 왠지 찝찝하다. 배 시간이 임박한데, 왜 다들 세월아 네월아지?
불안한 마음으로 대기실의 동태(?)를 살피는데, 저만치서 아까의 남자가 다가온다. 눈이 마주치자, 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는 손을 들어 알은체를 하더니, 우리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또 보네요.”
“덕분에요. 아무리 고맙다고 말해도 모자라요.”
“여행자들끼리 도와야죠. 나는 다크라고 해요. 다크 영.”
“재인이요.”
다크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야말로.”
다크는 어느새 몰려든 이집트 아이들과 놀던 해원 언니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휴우. 정말 덥네요. 그나저나 왜 배가 출발을 안 하죠?”
난 발랄한 억양의 영어에 고개를 돌렸다. 제 몸 만한 배낭을 짊어진 젊은 여성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다들 12시 넘어서 출발하는 배 맞죠?”
다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대체 제시간에 뭘 한다는 개념이 있긴 한 거야?”
“이집션 타임이라잖아요.”
내 말에 그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는다.
“그렇긴 해요.”
그녀의 이름은 엘레라 비티.
33살의 이탈리아인으로 해원 언니와 동갑이다. 나는 다크의 나이를 듣고는 너무 놀라 소리를 빽 질렀다. 180을 가볍게 넘는 키, 얼굴을 온통 뒤덮은 덥수룩한 적갈색 턱수염을 보고 30대는 족히 넘었겠거니 했건만, 고작 22살이란다.
나보다 어리다고?!
믿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