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전쟁 제12회
75%. 한국이 전 세계 HBM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입니다. SK하이닉스 53%, 삼성 22% — 두 회사를 합치면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HBM의 4분의 3이 한국에서 나옵니다. 반도체 역사상 한 나라가 핵심 부품에서 이 정도의 지배력을 가진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하지만 "지금 이기고 있다"가 "계속 이길 것이다"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이 연재는 GPU의 왕좌에서 시작하여, 메모리의 병목을 지나, 한국이 쥔 카드를 거쳐, 중국의 벽과 NPU의 확산과 에이전트의 등장과 전력의 한계를 넘어, 2028년의 미래까지 살펴봤습니다. 마지막 회에서는 이 모든 논의를 하나의 질문으로 모읍니다.
한국은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가.
한국의 강점을 정리하면, 그 무게는 상당합니다.
첫째, HBM 시장의 양면 장악입니다. 2025년 3분기 기준 SK하이닉스의 HBM 점유율 53%, 삼성의 22%는 경쟁사인 마이크론의 21%를 압도합니다(Counterpoint Research). 둘째, 2026년 2월 SK하이닉스와 삼성이 동시에 HBM4 양산을 시작한 기술적 성취입니다. 메모리의 수직 적층 기술, TSV(Through-Silicon Via) 공정, 선단 패키징에서 한국의 축적된 역량은 30년의 산물입니다.
셋째, 세계 최대 규모의 생산 인프라입니다. SK하이닉스의 이천·청주 캠퍼스, 삼성의 기흥·화성·평택 캠퍼스. 그리고 이 인프라를 둘러싼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생태계 — 이것은 단기간에 복제할 수 없는 자산입니다.
넷째, BofA에 따르면 2026년 HBM 시장 규모는 약 546억 달러이며, Micron은 2028년 HBM TAM(Total Addressable Market)을 1,000억 달러로 전망합니다. 시장 자체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고, 한국은 그 시장의 중심에 있습니다.
한국 반도체 전략의 규모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프로젝트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입니다. SK하이닉스는 이곳에 총 600조 원을 투자합니다. 당초 120조 원 계획이 5배로 늘었습니다. 클린룸 면적이 기존 대비 50% 확대되고, EUV 노광 장비를 비롯한 최첨단 설비의 가격 상승, 물가와 환율의 변동이 겹친 결과입니다. 향후 비용은 더 늘어날 수 있습니다.
2027년 상반기에 1기 팹이 가동을 시작하며, 차세대 HBM과 10나노급 DRAM을 집중 생산합니다. 각 팹의 규모는 최근 준공된 청주 M15X 팹의 약 6배에 달합니다. 팹 4기가 모두 완공되면 SK하이닉스의 월간 웨이퍼 생산량은 현재 45만 장에서 70만 장 이상으로 확대되어, 삼성전자(약 100만 장)와 박빙의 경쟁 구도가 형성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공장 투자가 아닙니다. 2050년까지 이어지는 초장기 국가 전략입니다. 국내외 소부장 기업 50여 곳과 반도체 협력 단지를 구축하고, 인접한 삼성전자의 이동·남사 국가산업단지(팹 6기 예정)와 함께 세계 최대의 반도체 생산 벨트를 형성합니다.
강점이 아무리 크더라도, 위협을 직시하지 않으면 강점은 빠르게 잠식됩니다.
첫 번째 위협은 마이크론의 급부상입니다. 마이크론은 뉴욕주에 1,000억 달러 규모의 팹 투자를 진행하고, 미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2026 회계연도 2분기 매출 239억 달러(전년비 196% 증가)는 AI 메모리 수요의 수혜가 한국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는 CXMT의 HBM 도전입니다(5회 참조). 성공 확률은 높지 않지만, "저가 HBM"으로 중국 내수 시장을 장악할 경우 글로벌 가격 체계에 파급이 있을 수 있습니다. CXMT는 42억 달러 규모의 상해 STAR Market IPO로 자금을 확보한 상태입니다.
세 번째는 NVIDIA 커스텀 HBM입니다(10회 참조). 2028년 Feynman부터 NVIDIA가 HBM의 로직 다이 설계에 직접 관여하면, 메모리 업체는 "설계 파트너"에서 "DRAM 스택 공급자"로 역할이 축소될 위험이 있습니다. 최대 고객의 발언권이 커질수록, 공급자의 협상력은 줄어듭니다.
네 번째는 HBM 프리미엄의 지속가능성입니다. HBM은 범용 DRAM 대비 수배의 가격 프리미엄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추론 최적화 칩(8회 참조)의 확산으로 일부 추론 워크로드가 HBM 대신 SRAM이나 LPDDR로 처리될 수 있고, HBM 생산 캐파가 충분히 늘어나면 프리미엄이 축소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위협은 현실적이지만, 대응할 시간이 있고 한국에는 대응할 역량이 있습니다.
단기적으로(2026~2027년), HBM4 양산 안정화와 HBM4E 16-Hi 스택 선점이 핵심입니다. NVIDIA Rubin과 Rubin Ultra에 대한 공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되, AMD·구글·아마존 등 고객 다변화를 통해 NVIDIA 의존도를 관리해야 합니다. 용인 1기 팹의 일정 내 가동이 가장 급한 과제입니다.
중기적으로(2028~2030년), Feynman 시대의 커스텀 HBM에 대응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은 cHBM 이니셔티브에 이미 참여하고 있으며, 첨단 로직 공정과 DRAM 공정을 결합하는 하이브리드 패키징 역량을 확보해야 합니다. CXL(Compute Express Link) 메모리 시장의 선점, NAND에서의 1,000층급 적층 기술 확보도 중기 과제입니다.
장기적으로(2031~2035년), 광 인터커넥트 시대의 메모리 융합 아키텍처, 차세대 메모리 기술(비휘발성 메모리, 뉴로모픽 칩)에 대한 기초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실행할 인력(11회 참조)과, 대규모 팹을 운영할 전력 인프라(9회 참조)의 확보가 전제됩니다.
이 연재는 GPU의 왕좌에서 시작하여, 메모리의 병목을 지나, 한국이 쥔 카드를 거쳐, 중국의 벽과 NPU의 확산과 에이전트의 등장과 전력의 한계를 넘어, 인재 전쟁과 2028년의 미래까지 살펴봤습니다. 보이지 않는 전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무기는 "지금 가장 앞서 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빠르게 다음을 준비할 수 있다"는 능력입니다. 30년간 메모리 전쟁에서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며 축적한 기술, 인프라, 인재의 저력입니다.
이 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끝나지 않는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Counterpoint Research, "HBM Market Share Q3 2025", 2025년 12월.
SK하이닉스 뉴스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 현황", 2025~2026년.
BofA, "2026 HBM Market Outlook", 2026년 1월.
TrendForce, "Samsung, SK hynix Tapped as NVIDIA Rubin HBM4 Suppliers", 2026년 3월 9일.
서울경제, "600조로 커질 용인 프로젝트 착수", 2025년 12월.
1. 이 글은 『보이지 않는 전쟁 — AI 반도체, 누가 미래를 지배하는가』 연재의 12회(최종회)입니다.
2. 이 글은 필자가 주 2회(월,목) 발행하는 브런치 매거진 'AI 트렌드 리포트'의 기획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