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년 전 실크로드의 상상력

신라를 바라본 페르시아의 시선입니다

by Robin 임봉규



역사는 흔히 승자의 기록으로 남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정사(正史)가 아닌 문학과 유물 속에서 더 생생한 진실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머나먼 이란에서 전해 내려온 고대 서사시 쿠쉬나메는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입니다. 11~12세기경 기록된 이 작품은 동쪽 끝의 나라를 ‘바실라(Bāsīlā)’라 부르며, 오늘날의 신라로 해석되는 공간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이 서사시는 역사서라기보다 당대 페르시아인이 인식한 세계관을 담은 문학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동아시아의 특정 국가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대목입니다. 이는 페르시아 세계가 이미 신라라는 나라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쿠쉬나메의 줄거리는 극적입니다. 페르시아 왕조가 몰락한 뒤, 한 왕자가 동쪽으로 이동해 마침내 바다 건너의 나라 바실라에 도달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고, 이후 다시 서쪽으로 돌아가 새로운 질서를 세운 인물로 묘사됩니다.


이 이야기는 한국에서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또 하나의 전설과 자연스럽게 겹쳐집니다.


문무왕의 사위가 페르시아 왕자였으며, 훗날 고국으로 돌아가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된 사실은 아닙니다. 다만 쿠쉬나메의 서사와 맞물리며 동서 교류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해 온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전설의 사실 여부가 아닙니다. 핵심은 당시 신라가 외부 세계와 연결된 공간으로 인식되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와 관련해 경주 일대에서 발견되는 고고학적 흔적들은 주목할 만합니다. 괘릉의 무인석상은 전형적인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푸른빛 유리기와와 장신구들은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신라는 결코 고립된 왕국이 아니었습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처용의 정체를 두고 서역 출신 이주민이나 외교적 인물로 해석하는 견해가 나오는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문헌과 유물은 신라가 외부 문명을 배척하기보다 흡수하고 공존하려 했던 사회였음을 암시합니다.


쿠쉬나메에 등장하는 신라 국왕의 이름이 실제 어느 왕을 가리키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문무왕, 헌강왕, 원성왕 등 여러 추정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이방의 왕자를 받아들이고 혼인까지 허락하는 포용적 통치자의 이미지입니다.


이는 페르시아인의 눈에 비친 신라가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국가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신라 공주와 페르시아 왕자의 혼인 이야기는 사실 여부를 떠나 분명한 메시지를 남깁니다. 고대의 한반도는 결코 닫힌 세계가 아니었으며, 당시 세계 문명의 흐름 속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이던 공간이었다는 점입니다.


사막을 건너 무역길을 잇고, 바다를 건너 새로운 시장과 동맹을 찾았던 사람들은 오늘의 우리 못지않게 바쁘게 살았습니다. 천 년 전 사람들 역시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기 위해 쉼 없이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쿠쉬나메 속 바실라 이야기는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국경을 넘어 살아가던 고대인들의 분주한 삶과, 개방과 포용이라는 신라의 정신을 오늘로 불러오는 상상력의 기록입니다. 그 바람은 실크로드의 끝자락에서 지금도 우리 곁을 조용히 맴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