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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둘, 나만을 바라보던 그녀.

by 송대근
“부모님께 대하여- 경례!”


2011년 1월 11일.

스피커에서 울린 바랜 금속성의 소리가 겨울 하늘을 쪼개며 울렸다.

나는 빡빡 밀린 머리로 부모님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많은 기억 속에서 그 장면은 유독 선명하다.


발가락을 벼르는 306 보충대 앞의 바람.

흙먼지를 실어 나르는 군용 버스의 회색 화약 냄새.

행정관들의 호통에 섞여 들리던 부모님들의 흐느낌까지.

모두 카메라 플래시처럼 번쩍이며 남아 있다.


하지만 그날, 나의 시선은 유난히 비어 있었다.

마치 고개를 들면 어디선가 그녀가,

그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가,

천천히 피어오를 것만 같아서.




입대 사흘 전, 그녀는 마지막이라고 할 만한 표정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지도, 애틋함을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잔잔한 한마디.


‘그럼 이젠 나 못 보겠네?’


그 말투.

늘 그렇듯 담담하고, 늘 그렇듯 서늘하게 유혹하는.

나는 그 한마디에 속수무책이었다.


“아냐. 세 달 뒤면 신병휴가도 있어. 또 한두 달에 한 번씩은 외출도 할 수 있다더라.”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래? 그럼 그땐 만날 거야?’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당연하지. 어떻게 안 만나.”


그녀는 늘 그랬다.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도,

입술 끝에 묘하게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날 못 참을걸?’

하는 듯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 말 없는 확신이, 나를 그녀에게 묶어두고 있었다.



군 생활은 생각보다 길었다.

해와 달이 수십 번 바뀌어도, 아무리 주말마다 환기를 해도, 막사는 늘 똑같은 남자들의 땀냄새로 가득 찼다.

건조한 연병장의 모래먼지, 오래된 침낭의 곰팡내, 난방기에서 새어 나오는 금속 탄내.


낮에는 네 시간, 밤에는 두 시간,

똑같이 생긴 위병소에 서서 멍하니 철책을 바라봤다.

손끝은 얼어붙어 굽혀지지 않았고, 얼굴은 바람에 쓸려 화끈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혹독한 시간 속에서도 나는 그녀를 거의 떠올리지 않았다.

어쩌면 떠올리는 방법을 잊어버렸는도 모른다.


전우들 사이에선 은근한 여자 이야기가 돌곤 했지만, 나는 그마저도 귀를 닫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부대 담장 너머에서 속삭이는 듯했기 때문이다.

‘춥지 않아? 날 품으면 따뜻해질 텐데.’

그 달콤한 유혹.

그 한마디가 스쳐가기만 해도, 나는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더 철저히 외면했다.

그녀를 그리워하지 않을수록, 오히려 그녀의 그림자는 더 짙게 나를 덮쳐왔다.


첫 휴가, 나는 그녀를 마주했다.

밤의 번화가는 사람들로 붐볐고, 바람엔 알코올 냄새와 여름의 눅눅함이 뒤섞여 있었다.

거리의 네온사인 아래, 그녀는 천천히 다가왔다.

‘많이 말랐네, 너.’

그녀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가볍고 매끄러웠지만,

그 속엔 어딘지 모르게 짙은 색이 흘렀다.

“너도 좀 말랐어.”

하지만 말라간 건 나였다.

군대라는 공간 속에서 감정이 말라붙어가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녀를 오래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조용히 골목으로 이끌었다.

편의점 불빛 아래, 그녀의 실루엣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마치 나를 탓하는 듯 보였다.


그날 밤, 나는 그녀에게 완전히 젖어들었다.

달콤하고 치명적인 무언가가 온몸의 긴장을 풀어놓았다.

그녀는 내가 잊고 지냈던 존재를 다시 세상에 꺼내주는 듯했다.


‘보고 싶었어.’


군대에서 잊었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은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그녀는 늘 기억 속에 있었고, 추억 속에 머물렀다.

마치 내가 돌아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

휴가가 올 때마다 나는 그녀를 찾았다.


어떤 날은 포장마차에서,

어떤 날은 편의점 앞 의자에서,

또 어떤 날은 방 안에서.


그녀는 매번 다른 얼굴로, 다른 향으로, 다른 분위기로 나를 맞았다.

그녀와의 시간을 반복할수록, 군대 안에서의 기억은 둔해지고 더 무감각해졌다.

하지만 그녀에게 받은 강렬한 온기가 사라지고 나면, 군대의 공기는 더 잔혹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복귀 하루 전날, 절대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

‘왜? 이제 마지막인데?’

그녀는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오늘은...”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그래, 네가 먼저 도망친 적이 있었나?’

그 눈빛은 마치 도발하는 듯했다.


그 무서운 집착에, 나는 도망치듯 돌아섰다.

군대 안으로 돌아오면 그녀의 기억은 빠르게 사라졌다.

총기를 억지로 갈아 끼우는 소리.

위병소 선풍기의 고장 난 팬만 돌아가는 소리.

불침번이 얼굴에 들이대는 손전등 불빛.

이 따위 현실 속에서 그녀를 생각하는 건 사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질수록,

전역 후의 막막함이 짙어질수록,

위병소에 설 때마다 뜬금없이 떠오르는 그 공상들은 사실 모두 그녀를 향한 회피였다는 걸.

나는 결국 다시 그녀를 떠올렸다.


‘나랑 같이 할래?’

전역 후에는 그녀와 함께 사업을 해 볼 생각도 했다.

그녀가 가진 선천적인 성격과 함께라면 번화가에서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핫도그 장사를 열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너랑 함께라면 뭐든 팔 수 있지.”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장고 끝에 악수라고 했던가.

나는 그녀와 함께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선택을 내리게 된다.

그렇게 전역 후, 내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아무도 모르게,

나조차도 알아채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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