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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셋, 꿈과 미로 속의 헤맴.

by 송대근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그녀의 말이 내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을 때, 나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분명 검붉은 피가 솟구쳤을 텐데, 그 온도가 너무 뜨거워 땅에 닿기도 전에 증발해버린 듯했다.

‘한 번만’이라는 말 뒤에 숨겨진 ‘한 번 더’.

그녀는 이미 나에게 수많은 기회를 주었다. 기회를 넘어, 마지막 기준을 직접 제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그 기준의 벽을 몇 번이나 타고 넘어가는 기행을 벌였고, 그녀가 더는 참을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모든 게 드러났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내 마음 속 심해에서 또 다른 ‘그녀’가 기어올라온 듯했다. 인면수심의 또 하나의 목소리.

‘괜찮아. 한 번쯤은.’

속삭이는 존재. 나는 그 목소리가 늘 그녀의 목소리인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그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나에게 딸린 ‘그림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사정일 뿐, 현실의 그녀는 차갑게 선을 그었다.


“그럼, 계약서 써.”


그녀는 마지막 기회를 주는 대신 계약서를 요구했다. 그러나 천사는 계약서를 쓰지 않는다. 계약서를 쓰는 존재는 악마와 인간뿐. 그렇다면 그녀는 악마일까? 아니다. 천사가 아닐 뿐, 그녀는 인간이고, 인간에게 끝없는 자비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나는 그녀의 요구에 따라 담담히 종이를 펼쳤다.


한 번 더 중독에 손을 대면, 그 즉시 그녀는 나를 포기하겠다는 문장들.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올 수많은 문제들.

실망, 분노, 배신감, 박살난 신뢰, 우리가 함께 그려오던 미래의 유기.

나는 그 모든 문장을 조용히 종이 위에 옮겼다. 어쩌면 그 계약서는 내 유서에 가까운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누군가와 이 약속을 한다는 것은 결국 내 안의 무언가를 죽이겠다는 결심이기 때문이다.


...(중략)
현시간 이후 음주할 경우 이혼합니다. (서명)


그렇게 계약서의 마지막 문장을 장식하고, 우리는 다시 일상을 시작했다.

시작했지만, 그것이 일상일 리 없었다.


“술 마셨어?”

“아니.”


짧은 문답 속에서도 그녀의 눈빛은 예전과 달랐다. 기준이 명확해진 그녀는 이제 작은 몸짓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야박함도, 불신도 아니었다. 전부 내가 만든 결과였다. 파탄의 씨앗을 뿌린 건 나였고, 의심의 그림자를 키운 것도 결국 나였다.


술에 대한 충동은 갈증에 가까웠다. 목이 마르면 물을 찾듯이, 마음이 마르면 술을 찾았다. 아무리 참아도 근본적인 욕구는 말라 없어진 적이 없었다.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머릿속에 웅웅 울리는 질문. 때로는 ‘그녀’의 목소리로 들렸고, 때로는 내면 깊숙한 곳 ‘그림자’의 조롱으로 들렸다.

‘그녀’라고 하지만, 늘 내 안에서 만든 문장, 내 안에서 들리는 환청.

그래. 그녀가 아닌, ‘그림자’


그때쯤 이미 나는 중독의 광야의 주인이 되어, 과실을 수확하고 있었다. 나 자신의 일부가 곧 그녀라는 그림자였고, 그 충동을 잘라낸다는 것은 내 살점을 떼어내는 자해였다. 뇌의 충동 중추를 도려낸다면 많은 일이 쉬워지겠지만, 그것은 비현실적인 망상일 뿐.




세상에는 ‘한 잔’의 유혹이 너무 많았다.

심심하니 한 잔,

친구들과 한 잔,

자기전에 한 잔.


수 많은 유혹의 장막 속에 숨어든 나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미로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하지만 예상과는 반대로 그 미로의 안은 포근했다. 길을 잃었다는 사실은 두렵다. 하지만 길을 잃을 정도로 어려운 미로는, 누구도 나의 영역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이었다. 미로 속은 남들에게 닿지 않는 나만의 성이었다. 출구가 없다는 사실이 도리어 위안이 되기도 했다.

멈춰 있어도 괜찮은 공간, 스스로를 속일 수 있는 장소. 그래서 나는 쉽게 거기 눌러앉았다.


‘미로 속도 나쁘지 않잖아?’

‘자유를 포기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림자의 속삭임. 그래, 나쁘지 않았다. 아니, 아주 편했다. 나는 속박을 좋아한다.

하지만 안락함은 달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썩어가는 설탕이다. 미로 속 공기는 점점 눅눅해졌고, 단단하던 벽에는 균열이 생겼다. 틈에서 쏟아지는 끈적한 알코올 냄새,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깨진 술병 파편.


“요즘 뭐하니? 주말에 등산이라도 갈래?”

“동호회라도 가입해. 혼자 있으면 더 우울해진다더라.”


나는 어느 순간, 그 균열 틈으로 언뜻 보이는 바깥의 빛을 보게 됐다. 나는 빛이 두려웠다. 빛이 내가 얼마나 초라한지, 얼마나 지저분한지, 얼마나 용기가 부족한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미로의 벽에 손을 짚었다.

어둡고, 차갑고, 울퉁불퉁한 그 감촉을 느끼며, 미로의 더 어두운 부분을 찾아 숨어들었다. 단순한 방법을 선택했다.


하지만 도망은 순간일 뿐.

언젠가는. 언젠가는.

“벽을 짚고 한 방향으로 계속 걸어 나가면, 언젠가는 출구에 다다르게 되겠지.”

단순하고 무식한, 모든 미로의 공통된 탈출법이다. 그래서 나는 그 방법을 택했다. 거창한 결심도, 대단한 각성도 없었다. 그저 손을 벽에 대고 걸어가는 것.

모든 종류의 충동과 중독의 생김새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나 자신으로 받아들인다.


‘목말라!’

“어차피 마셔도 금새 다시 목마르잖아.”


내 못생긴 일부를 잘라내는 대신, 그것도 나의 일부임을 이해한다. 갈증이 올 때마다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다시 걷는 것. 갈증과 자해에 가까운 음주충동이 치밀어 오를 때마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 이래야 나지.”

“근데, 자해한다고 나아지지도 않아. 그냥 내가 원래 좀 그래.”


일기를 써 내려가면서 나의 모든 충동의 모습을 기록했다. 지나간 과거의 나의 모든 모습을 고백했다. 내 인간성의 한계가 어디서 드러나는지 적었다. 언제 내가 충동을 느끼지 않는지, 언제 멈출 수 없는 극심함 갈증이 찾아오는지, 언제 졌는지, 언제 이겼는지 모든 순간을 기록하고 데이터로 남겼다. 그게 필요했다.


필요했다.


술을 직접 담그고 그 술을 내다 버렸다. 술을 마시고 후회하는 일기를 쓴다. 술을 마시지 않은 날은 위안의 일기를 쓴다. 무의미한 일은 반복한다. 하지만 무의미하지 않았다. 중독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것을 넘은 나 자신에 대한 이해.


언젠가는 이 미로에도 출구가 있다는 믿음 하나로.


미로는 여전히 어둡고, 나는 아직도 그 안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손끝으로 느껴지는 벽의 질감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벽 너머의 차가운 공기가 요동치기도 하고, 아주 멀리서 계절의 바람이 스칠 때도 있다. 나의 바람은 아직 내게 닿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닿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벽을 짚고 걷는다.

천천히. 두렵게도 천천히.

끝을 알 수 없다는 공포감.

이 미로에는 출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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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