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디 코베, <브루탈리스트>
브래디 코베 감독의 <브루탈리스트>는 영화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기념비 같다. 3시간 35분이라는 압도적인 러닝타임, 극장 상영 중 존재하는 ‘인터미션’은 그 자체로 이 영화의 무게를 짐작하게 한다.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감독상)과 아카데미 3관왕이라는 화려한 명패는 그 무게를 더한다. 하지만 그 무게의 중압감만큼이나 관객을 부드럽게 설득하지 않는 완고한 태도는 이 영화에 대한 극단적인 호불호를 낳았다. 압도적인 찬사와 동시에 “야심은 과하지만 실행은 산만하다”거나 “감정적으로 공허하다”는 비판이 공존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뜻 다가서기에 쉽지 않은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처럼 버티고 서서 우리가 그 거친 표면과 내부의 뼈대를 직접 해독하길 요구한다. 이 글은 그 난해한 건축물의 내외부를 살펴보면서 부분 부분의 의미를 헤아려 보려 한다. 이 건물을 지탱하는 4개의 핵심 요소를 들여다보자.
중심 기둥: 라즐로 토스 Vs. 해리슨 리 밴 뷰런
모든 위대한 건축물은 그것을 지탱하는 중심 기둥에서 시작된다. 이 영화의 기둥은 단연 두 남자, ‘라즐로 토스(에이드리언 브로디 분)’와 ‘해리슨 리 밴 뷰런(가이 피어스 분)’이다.
라즐로 토스는 트라우마로 갑옷을 입은 예술가이다. 라즐로는 헝가리계 유대인이자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생존자이며, 미국으로 망명한 선구적인 건축가이다. 그의 영혼은 평온과는 거리가 멀다. 그 내면은 유럽에서 겪은 참극에 대한 ‘분노와 고뇌, 우울’로 들끓는다.
이 지점에서 에이드리언 브로디에게 오스카를 안긴 <피아니스트>의 ‘스필만’을 소환해야만 한다. <브루탈리스트>는 유대인 연대기 상으로 볼 때, <피아니스트>의 속편이라 할 수 있다. <피아니스트>의 스필만이 모든 것을 잃고 생존을 위해 ‘수동적’으로 무너져 내리며 거의 동물적인 상태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렸다면, <브루탈리스트>의 라즐로는 그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이후’의 남자다.
그는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다. 그는 트라우마를 분노의 연료로 삼아 무언가를 창조하고 건설하려는 광적인 열망으로 불타오른다. 그가 자유의 여신상을 보며 가슴 벅차하던 감정이, 영화가 진행되면서 주변 세계의 침식으로 인해 차갑게 식어가는 과정 자체가 이 인물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해리슨 리 밴 뷰런은 미국 자본주의의 ‘두 얼굴’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라즐로의 자비로운 후원자로 등장하는 부유한 사업가 밴 뷰런은 이 영화의 핵심 적대자다. 그는 단순한 악당이 아니다. 가이 피어스는 세련된 기질 아래 어두운 충동을 숨긴, 두 얼굴을 가진 인물을 창조했다.
밴 뷰런의 내면은 불안정함과 예민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라즐로의 예술적 창의성을 질투하고,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유럽의 미학에 지독한 열등감을 느낀다. 이런 그가 라즐로를 후원하는 것은 질투와 열등감의 대상인 예술가를 ‘소유’하기 위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관계의 설계: ‘파트롱’이라는 잔혹한 계약
영화 속 두 주인공의 숨 막히는 갈등관계를 ‘파트롱(Patron)’ 문화라는 역사적 틀로 분석해 보자. ‘파트롱’은 ‘보호자’ 또는 ‘아버지’를 뜻하는 라틴어 ‘파트로누스(Patronus)’에서 유래한 단어로, 예술가에게 재정 지원을 제공하는 후원자를 의미한다. 유럽 역사에서 이 관계는 크게 두 가지 모델로 나타났다.
먼저 고대 로마 모델인 ‘클리엔텔라(Clientela)’가 있다. 로마의 ‘파트로누스(보호자)’는 자신의 ‘클리엔스(피보호자)’에게 법률적, 재정적 보호를 제공했다. 그 대가로 클리엔스는 파트롱에게 절대적인 ‘충성’과 ‘정치적 지지(투표권)’ 등의 ‘봉사’를 바쳤다. 이는 ‘보호’와 ‘충성’을 교환하는 위계적인 정치 계약이었다.
그다음으로 르네상스 모델인 ‘메체나티스모(Mecenatismo)’가 있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같은 부유한 은행가들은 예술가를 후원하며 권력을 과시했다. 당시 기독교 교리상 이자를 받는 은행업(고리대금업)은 ‘파문에 해당하는 죄’이자 ‘가장 멸시받는 직종’이었다. 그들에게 막대한 예술 후원은 더러운 돈을 세탁하는 이미지 세탁이자 ‘그림 면죄부’였으며,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라즐로와 밴 뷰런의 관계는 이 두 모델이 20세기 미국 자본주의 안에서 최악의 형태로 변질된 모습이다.
라즐로는 궁극의 ‘클리엔스’다. 그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낯선 땅에 온 이민자이며, 모든 것을 잃은 빈털터리다. 그는 로마의 클리엔스처럼 생존을 위한 ‘보호’가 절실하다. 밴 뷰런은 완벽한 ‘파트롱’이다. 그는 르네상스 은행가처럼 신흥 사업가의 부를 가졌고, 라즐로에게 일생일대의 건축 프로젝트(어머니를 기리는 건물)를 의뢰한다.
하지만 밴 뷰런이 원하는 대가는 충성(로마 모델)이나 명예(르네상스 모델)가 아니다. 그의 후원은 서서히 소유 의식으로 변질된다. 그는 라즐로의 재능뿐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를 소유하려 한다. 이 관계의 본질은 한 국내 비평(씨네21)이 인용한 건축가 필립 존슨의 “건축가는 상류층의 창녀다”라는 도발적인 문장에 압축되어 있다. 라즐로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재능, 즉 ‘아름다움’을 팔아야 하는 위치에 있다.
이 잔혹한 은유는 밴 뷰런이 라즐로를 성적으로 유린하는 암울한 클라이맥스에서 문자 그대로 실현된다. 이때 밴 뷰런이 내뱉는 “당신은 그냥 하룻밤 매춘부”라는 대사는, 미국식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파트롱’ 시스템이 예술가를 어떻게 소비하는지 폭로하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이는 “아메리칸 드림이 이민자를 ‘강간’한다”는 영화의 핵심 은유를 완성한다.
시대의 지반: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피난처
라즐로가 왜 그토록 착취적인 밴 뷰런의 파트롱 관계에 묶일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려면, 그가 도망쳐 온 유럽과 그가 도착한 미국의 진짜 얼굴을 알아야 한다.
라즐로가 도망쳐 나온 곳은 홀로코스트의 잿더미이다. 홀로코스트는 나치 독일이 자행한 600만 유럽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이고 관료적인 대량 학살이었다. 1945년, 수용소가 해방되었을 때 라즐로 같은 생존자들은 가족, 집, 공동체 등 모든 것을 잃었다.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는 단순히 모든 것이 파괴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1946년, 즉 전쟁이 끝난 후 폴란드 키엘체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 42명이 현지인들에게 살해당하는 ‘포그롬(집단 학살)’이 또다시 발생했다. 유럽은 여전히 유대인들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갈 곳 없이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에 설치된 ‘실향민 캠프’에 수용되었다. 약 25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 ‘역사의 대기실’에서 운명을 기다렸다. 그들에게 선택지는 사실상 ‘팔레스타인’과 ‘미국’ 두 곳뿐이었다.
라즐로는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을 택했다. 이민자들이 건설한 나라 미국. 하지만 그들을 환영하는 ‘황금의 문’은 라즐로가 영화 초반에 목격하듯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에 불과했다. 1940~50년대의 미국은 결코 기회의 땅이 아니었다.
미국은 난민 정책이 없었고, 1924년에 제정된 인종차별적인 ‘쿼터법’에 따라 바람직하지 않은 인종으로 분류된 동유럽 유대인들의 이민을 극도로 제한했다. 전쟁 후에도 여론은 난민 수용에 적대적이었다. 1948년 통과된 ‘실향민법’은 ‘1945년 12월 22일 이전’ 도착자라는 기준을 두어 1946년 키엘체 포그롬 등을 피해 이후에 도착한 수많은 유대인 생존자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라즐로가 정착한 1950년대 미국은 표면적으로 ‘황금기’였지만, 홀로코스트는 누구도 입에 담지 않는 ‘침묵의 시대’였다. 생존자들은 주류 사회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경험에 대해 침묵해야 했다. 당시 미국에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주택 구입 차별, 고용 차별은 물론, 심지어 회당에 대한 폭탄 테러 시도까지 발생했다. 한 역사가는 이 상황이 “독일에서 홀로코스트를 초래했던 일부 사건들과 유사했다”라고 지적한다. 라즐로는 파시즘이라는 폭력을 피했지만, 그가 도착한 미국은 ‘잔혹한 미국(America the Brutal)’, 즉 차별과 자본 논리가 숨겨진 또 다른 ‘잔혹한’ 땅이었다.
트라우마의 물리적 투영: ‘브루탈리즘(Brutalism)’
이 모든 인물, 관계, 시대적 배경은 영화의 제목이자 주제인 ‘브루탈리스트(Brutalist)’의 건축물에 하나로 응축된다. ‘브루탈리즘’은 ‘가공되지 않은 콘크리트’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베통 브뤼(béton brut)’에서 유래했다. 이 건축 양식은 ‘장식 없는’, ‘요새와 같은’, ‘정직한’ 노출 콘크리트 구조가 특징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어원보다 영어 단어 ‘Brutal(잔인한)’의 함의를 중의적으로 사용한다. 영화의 제목 <브루탈리스트>는 아래의 세 가지 대상을 동시에 가리킨다.
라즐로, ‘잔혹하게 유린당한 자(The Brutalized)’
영화의 핵심 은유는 라즐로가 단지 ‘브루탈리스트(건축가)’일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홀로코스트와 자본주의에 의해 ‘잔혹하게 유린당한(Brutalized)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의 건축은 그의 심리 그 자체다. 그가 짓는 ‘요새와 같은’ 건물은, 파시즘과 반유대주의라는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다시는 누구에게도 위협받지 않을’ 견고한 심리적 방어기제이자 갑옷이다. 그의 ‘가공되지 않은’ ‘정직한’ 콘크리트 외벽은, 밴 뷰런의 ‘두 얼굴’과 정반대가 되는 그의 유린당한 내면의 표현이다.
밴 뷰런, ‘잔혹한 자(The Brutal)’
밴 뷰런은 이 ‘잔혹성’을 휘두르는 주체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갈등은 라즐로의 걸작인 문화 센터 건축 과정에서 발생한다. 라즐로는 건물의 천장을 높여 ‘빛이 들어오는 천장’을 만들려 한다. ‘빛’은 그의 ‘정신’이자 ‘구원’을 상징한다. 하지만 파트롱인 밴 뷰런은 예산을 이유로 천장을 3미터 낮추라고 강요한다. 이는 자본(밴 뷰런)이 예술의 영혼(라즐로의 빛)을 문자 그대로 짓누르는 행위다. 이 ‘빛’을 지키기 위해 라즐로는 ‘자신의 설계비를 줄여서라도’ 그 높이를 사수하려 한다. 예술가는 파트롱에게 자신의 육체(노동의 대가)를 바쳐서라도 정신(예술)을 지키려는 마지막 저항을 한 것이다.
미국, ‘잔혹한 시스템(The Brutal System)’
결국 <브루탈리스트>는 라즐로(유린당한 자)와 밴 뷰런(유린하는 자), 그리고 이 모든 비극을 가능하게 한 시스템, 즉 ‘잔혹한 미국(America the Brutal)’이다. 감독 브래디 코베는 이 영화를 ‘파시즘을 피해 도망친 인물이 자본주의와 마주치는 이야기’라고 명쾌하게 요약했다. 자유의 여신상이 약속한 ‘황금의 문’은, 사실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처럼 라즐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를 지탱하는 4개의 핵심 요소를 들여다보았다. 이 거대한 조감도를 통해 <브루탈리스트>를 다시 본다면, 3시간 35분은 한 예술가의 영혼이 어떻게 구원을 갈망하고, 어떻게 배신당하며, 결국 어떻게 스스로를 거대한 콘크리트 요새 안에 봉인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장엄하고도 슬픈 기록으로 다가온다. 영화 자체가 ‘완고하고 도전적인’ 하나의 브루탈리즘 건축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