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붕괴, 그리고 아무 말
때때로 인간관계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리 거창하게 정해놓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상대를 개조하려고 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해놓은 목표를 사랑하는 것이다. 왜 자연 대상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인간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일까?
지금 이 순간 우리로 하여금 계속 바라보고 몰두하게끔 하는 것들이 있다. 흐르는 물 , 벽난로 속 타오르는 불꽃, 열어젖힌 창문을 넘어 귓가를 스치는 바람과 비가 온 다음이면 시선을 잡아끄는 눈부시게 푸른 하늘. 추운 겨울날 잠시 앉아 느끼는 흙의 따스함과 모든 것이 고요해진 밤, 온몸에 스며드는 어둠의 아늑함... 이 '이유 없는 행복'들이 우리에게 은은한 기쁨을 준다.
<장자와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양승권)
오랜만에 산으로 향했다. 여름이 되어가는지 확실히 녹음이 우거진 모습이었다. 한 달 전과 길이 달라져있었다. 무성해진 잎들 덕분에 길이 좁아졌고, 햇빛은 더 강했지만 그늘도 많아졌다. 어찌 되었건 아름다웠다. 산에서는 날씨가 맑으면 좋고, 추우면 낭만 있고, 길이 험하면 재밌고, 쉬우면 편해서 즐겁다. 낙엽이 지면 화려하고,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는 위로가 되고, 싹이 돋고 꽃이 피면 눈이 부시다. 난 산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아름답다고 말한다.
왜 자연 대상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인간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할까.
이해란 무엇일까.
"나는 이해한다. 고로 붕괴한다"라고 이야기했던 테드 창의 단편소설 <이해>를 떠올려본다.
주인공 리언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한다면, 레이놀즈는 인류 전체를 사랑한다. 리언에게 지능은 목적이며, 인류는 그의 지능을 향상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진다. 반면 레이놀즈는 인류의 행복이 자신의 목적이며, 지능이 그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둘은 서로의 이데올로기가 완전히 다르며,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리언과 레이놀즈의 목숨을 건 한판 싸움이 벌어진다. 그것은 물리적 충돌과는 조금 다르다. 리언은 레이놀즈의 물질대사를 조절하여 뇌의 모세혈관을 파괴하려 하나, 이 공격을 막아낸 레이놀즈가 반격한다.
연극적인 몸짓으로 레이놀즈가 한 손을 들어 올린다. 마치 무엇인가를 강조하려는 듯이 집게손가락을 뻗치고 있다. 내게는 그의 파괴 커맨드를 생성할 수 있을 만큼 정보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일단은 방어에 전념하는 수밖에 없다. 만약 그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나 자신의 공격을 투사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말한다. “이해해.”
처음에는 못한다. 그런 다음, 소름 끼치게도, 나는 이해한다.
레이놀즈는 입 밖에 내서 말하는 커맨드를 설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감각을 통한 유발 자극이 결코 아니었다. 기억 자극이었다. 이 커맨드는 개별적으로는 아무런 해가 없는 일련의 지각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는 이것들을 내 뇌 속에 마치 시한폭탄처럼 심어놓았던 것이다. 이 기억의 결과로써 형성된 정신 구조들이 이제 하나의 패턴으로 융합되기 시작해 나의 붕괴를 규정하는 게슈탈트를 형성한다. 나는 스스로 ‘말’을 직감하고 있다.
즉시 나의 마음은 유례가 없을 만큼 빠르게 작동하기 시작한다. 나의 의지에 반해 치명적인 인식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는 연상 작용을 멈추려고 하지만, 이 기억들을 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과정은 나의 자각의 결과로써 가차 없이 진행된다. 나는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사내처럼 억지로 보고 있는 수밖에 없다.
몇 밀리세컨드가 경과한다. 나의 죽음이 내 눈앞에서 진행된다.
레이놀즈가 지나갔을 때 그 잡화점의 이미지.
소년이 입고 있던 사이키델릭 셔츠. 레이놀즈는 셔츠의 디스플레이를 프로그래밍해 나의 내부에 암시를 심어놓았고, ‘무작위로’ 리프로그래밍된 나의 사이키가 이 암시에 반응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미 그때.
시간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맹렬한 속도로 나 자신을 무작위하게 메타 프로그래밍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자포자기적인 행위이고, 영구적인 기능의 상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
처음 레이놀즈의 아파트로 들어설 때 들었던 기묘한 변조음. 나는 어떤 방어도 개시하기 전에 이 치명적인 통찰을 흡수했다.
나 자신의 사이키, 나의 정신을 찢어발기지만, 여전히 결론은 점점 더 명료해지고, 선명도는 점점 더 뚜렷해질 뿐이다.
시뮬레이터를 구축하는 나 자신. 이 방어 구조를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나는 문제의 게슈탈트를 인식할 수 있는 관점을 획득했다.
그가 나보다 더 독창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의 계획에는 분명 좋은 징조이다. 구세주에게는 심미주의보다는 실용주의 쪽이 훨씬 더 쓸모가 있다.
세계를 구원한 후 그는 무엇을 할 작정일까.
나는 ‘말’을 이해하고, 그것이 작용하는 방식을 이해한다. 고로, 나는 붕괴한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중에서
리언의 시점으로 쓰인 이 소설은 이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책을 처음 읽을 당시 독서노트에 적어둔 코멘트를 발견했다.
“이해해.”
자신을 이해하라는 레이놀드의 공격. 리언은 자신의 존재 기반과 존재 목적을 잃지 않기 위해 마음의 방어벽을 만들기 시작한다. 역설적이게도 완벽한 방어벽을 만들기 위해서는 레이놀드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렇게 리언은 죽어간다.
이 죽음이 존재의 파멸은 아닐 것이다. 리언은 레이놀드의 사유를 이해하게 됨으로써 지금까지의 자신이 아닌 새로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붕괴라 표현했을 뿐.
진정한 이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나 자신을 완전히 버려야만 가능한 것.
여기까진 좋다. 뒤의 내 다짐이 이제는 조금 꼴사납게 느껴질 뿐.
이해.
나를 죽이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일. 동시에 그 역시 자신을 죽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일.
상대를 이해하는 것은 죽음보다 위협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위험을 감수하기에 우리가 인간인 것이 아닐까.
끝없이 붕괴할지언정, 타인을 이해하는 삶을 살아야지.
한때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는 삶을 꿈꿨다. 모두를 이해하고자 했고, 이해가 안 되면 상대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꾸짖었다.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든다. '나 혼자만' 끝없이 붕괴하는 삶. 조금 역겹다.
갑자기 장자의 철학이 실패한 패배주의자들의 정신 승리 철학으로 비난받는다는 사실이 너무 웃기다. 모든 것은 자기 마음먹기에 달렸기에 남 탓도 못하고 자기혐오에 빠졌던 내가 있는데.
오늘 함께 등산을 다녀온 친구 C가 "인간관계도 참 어려운 줄다리기 같아."라고 말했다.
학창 시절 줄다리기를 하면 항상 맨 앞을 맡았다. 매번 힘을 주고 있었기에 이겨서 기뻐하거나 넘어져서 끌려가기 일수였다. 승패와 상관없이 다쳤던 기억이 난다. 줄다리기에서 넘어지지 않은 친구들을 보면 경기에 진심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줄을 쥐고 있었다.
나는 대체로 줄을 잡아당기는 역할이었다. 상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항상 최선을 다해 줄을 당겼다.
요즘은 그저 우두커니 멍하게 서서 줄을 쥐고 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실은 나 이제 너무 지쳤으니 당신들도 부디 한 번쯤 나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라고 발악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통하지 않는다면 뭐, 내친김에 이대로 살 생각이다. 누군가 당기면 당기는 대로, 밀면 미는 대로 움직이는 삶, 편하고 좋다. 아 어쩌면 장자의 무위가 이런 거였을까. 절대 아닐 테지만 이젠 사실 뭔들.
여기까지만 쓴다. 앞으로 인생을 살며 수 없이 고민하고 또 변화할 주제이기에, 글쓰기를 망설이게 되어 손이 가는 대로 썼고 고치지 않았다. 사유는 항상 하는 것이지만 글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다. 내 생각은 나의 글보다 짙고 다채롭다. 따라서 제목을 사유의 파편이라 붙여본다. 파편은 전체의 일부일 뿐이며, 깨진 조각이기에 날카로울 수밖에. 오늘은 유난히 날이 섰지만 언젠가 무딘 조각도 있겠지.
먼저 등산을 제안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들려준 친구 C에게 감사를 표하며 오늘의 사유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