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감정을 정리하고 공부에 집중하겠다
스스로 다짐했지만, 내 마음속까지 완전히 비워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즈음부터 시와 음악을 예전보다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들과 늘 우리의 아지트로 갔다.
교정 끝, 따뜻한 햇볕이 교정의 유리창을 타고 부드럽게 내려앉는 곳.
그 햇살 아래에 길고 작은 담벼락 끝, 모퉁이에 우리만의 아지트가 있었다.
그곳은 선생님도 다른 친구들도 모르는
오직 우리만의 아주 작은 조용한 세상, 아늑한 공간이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은은한 풀 내음과 꽃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그 상큼하고 그윽한 향은 내 마음까지 맑아지게 하고 기분좋게 한다.
빛나도록 투명한 햇살은 우리를 기다린 듯
그 자리를 더욱 따뜻하고 아늑하게 품어준다.
학창 시절의 나는 시 한 줄에도 마음이 설레던 아이였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시를 읽을 때면 시와 내가 하나가 되는듯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 하나로 세상이 충분히 아름답게 느꼈다.
그 순간은 마치 온 세상이 나를 위해 잠시 세상이 멈춘 듯 고요했다.
릴케와 바이런의 시집을 늘 가슴에 품고 다녔다.
어떤 이유에서 릴케를 좋아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하지만 그 시를 품고 있던 그때의 마음만은 기억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바이런의 잘생긴 외모에 이끌려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계기로 릴케와 함께 내 마음속 가장 친한 벗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비록 시작은 단순한 호기심이었지만,
그 이후로 릴케와 바이런은 내 곁에서 나의 마음속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 시절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참 행복했다.
별것 아닌 친구들의 말 한마디에도 꺄르르 웃음이 터졌고,
그 웃음소리는 햇살과 어우러져 교정 위에 반짝이며 맑게 퍼져나갔다.
우리는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눈부셨다.
웃음만으로 하루가 충분히 빛나던 시절이었다.
세월은 흘렀지만, 친구들과 함께였던 봄날은
내 안에서 아직도 가장 순수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주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며,
'아, 나는 이런 아이였구나'를 조심스레 되짚어본다.
잊고 지냈던 나를 천천히 다시 불러내며
잃어버렸던 나 자신을 되찾는 여정을 나는 지금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