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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르셔 꽤 Dec 15. 2020

입주도우미 1년 후기

인생 참 꽃같네요.

올해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어요. 둘째는 딸이기도 하고, 첫째와 달리 사회적 지능이 부족하지 않고, 둘째답게 눈치도 있으며, 여자 아이 특유의 기본적인 사람 구실 능력을 장착하고 있어요. 그래서 굳이 제가 휴직을 하며 뒷바라지를 하지 않아도 적당히 학교에 적응하며 잘 다닐 거라는 작은 믿음이 있었어요.

하지만 첫째를 초등학교에 보낸 후 2년 간 살펴보니 학기별로 4번 정도는 학교에 가야 할 일이 생기고(상담, 공개수업, 재능발표, 체육대회 등), 애가 아프거나 학교 일정상 하교 시간이 달라질 때 아이가 걱정이 되더라구요. 또 첫애는 휴직하며 돌봐줬는데 둘째한테는 '널 믿어, 잘할 수 있을 거야.' 하며 이른 홀로서기를 시키자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어요.

그래서 고민이 좀 됐어요. 제 학교 생활이 너무 힘들면 옳다구나 남은 육아휴직을 쓰겠지만

저는 그럭저럭 학교도 다닐 만하고, 이미 5년 정도 휴직을 하기도 했고, 그간의 휴직라이프가 즐겁지만도 않았고, 또 내년에 복직자가 되어 적응하는 것도 피곤하고 해서 휴직을 하고픈 마음이 안 들더라구요.


그러다 문득

워라벨 따위는 개나 주고, 자신은 기꺼이 소가 되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가까운 지인이 생각났어요. 10년 넘게 그렇게 일을 했으니 힘들어하기도 했고, 건강도 염려스러웠죠. 또 휴식이나 일탈이 필요해 보이기도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번 물어봤어요. 혹시 휴직하고 저희 살림과 아이들을 돌봐줄 수 있는지요. 지인은 생각을 좀 해보겠다고 하더니, 며칠 후 긍정적인 답을 보내왔어요. 막상 오케이 싸인이 떨어지니 한편으론 걱정이 되더군요. 이런 일을 해오던 사람이 아닌데 잘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서로 조심스럽게 합의는 봤지만 사실 걱정 반 염려 반, 불안불안했어요. 하지만 워낙 가까운 사이고, 저와 아이들에 대해 빤히 아는 사람이라 단점을 상쇄하고 남을 만큼의 장점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그렇게 저는 지난 1월 1일부터 입주도우미가 있는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적의, 용모 단정한, 40대 초반의, 고학력 입주도우미’를 들인 능력 있는 여자가 바로 저예요! 일 년을 경험해 보니 정말 신세계입니다.


1. 퇴근 후 부리나케 달려가 아이들을 챙기지 않아도 되는 게 제일 좋아요. 전에는 저희 반 얼간이들을 지도하다 보면 반드시 퇴근 시간을 한참이나 넘기고는 택시기사처럼 거칠게 운전을 해서 집에 갔거든요. 몸도 마음도 여유 없이 사는 게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이제는 제 마음대로 야근도 하고 약속도 잡을 수 있어서 살 것 같아요. 저는 1월 2일 딱 하루 근무하고 바로 깨달았어요. 대한민국 남자들이 회사 잘 다니며 능력을 인정받는 건 다 집에서 아이들을 케어해주는 아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저도 집에서 아이들 케어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마음에 부담이 없어서 정말 일하는 게 천국이더라구요. 생기부 처리하느라 초과근무를 하면서도 눈누난나 콧노래를 흥얼거렸죠. 마음껏 야근하는 삶은 천국이던데요! 진짜 안사람이 있다는 건 어마어마하게 든든한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날 이후 제 마음대로 아무 때나 귀가하는 삶을 누리고 있어요.


2. 당연히 아침에도 여유가 넘쳐요. 저는 다른 것은 다 맡기고 그날 입을 아이들 옷만 준비해서 내놓아요(지인과 저의 미적 취향이 좀 달라서요.). 아침에 남이 차려주는 밥 먹고 제 몸뚱이만 챙겨서 나오니 이건 뭐 사는 게 쉬워지는 수준이에요.


3. 퇴근 후 집에 들어설 때마다 희열을 느껴요. 집들이 직전 손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정갈한 집을 상상해 보세요. 그 전에야 생각하시는 그대로입죠. 네 맞아요, 개판이었어요.


4. 이건 개인적인 선호 사항입니다만 아침에 일어날 때 잠결에 도각도각 도마질 소리와 치지직 요리하는 소리를 들으며 깨는 게 정말 좋아요. 어릴 때 잠결에 듣던 엄마의 소리라서요. 잠시나마 평온하고 포근했던 유년으로 돌아간 듯 행복해져요.


5. 집안일이 제 일이 아니라는 게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서 너무 좋다고 쓸 수밖에 없어요. 잠시나마 주부라는 역할을 내려놓으니 삶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6. 그리고 고학력의 한국 국적 도우미라 아이들 공부나 독서 등에서 작은 도움을 받는 것도 좋아요.





물론 단점도 있지요, 당연히.

1. 우선 매월 공무원 월급만큼 손실이 있어요.


2. 지인이 열심히 집안일을 하는데 저는 쉬자니 마음이 편치 않아요.


3. 전문가가 아니라 가까운 지인을 섭외했으니 아쉽거나 불편한 점이 있어도 감수해야 해요.


4. 저희 집은 방이 셋인데 아들 하나 딸 하나 주고 나면 남는 방이 없어요. 하는 수 없이 도우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어요.


5. 대한민국 국적, 40대 초반, 고학력자를 입주도우미로 쓰면서 공무원 월급만큼 주는데 어떻게 여자분을 구하겠어요. 그래서 성별은 포기했어요. 그러니 아무래도 여자들만큼 손이 빠르고 여물지는 못해요.


6. 아이들이 학교나 학원에 가고 나면, 가끔 집에 둘만 있게 되는데 그때 이 인간이 이상한 마음을 품기도 해요. 알고 보니 기회주의자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입주도우미가 있는 이 삶이 정말 좋아요. 저도 아이들도 제 지인도 대만족 중입니다. 지인은 (양심도 없이) 스스로에게 근평 100점을 주고는, 이 일이 꽤나 적성에 맞다며 다음 세상에선 전업주부로 태어나고 싶대요. 그러거나 말거나 그건 그 인간 일이고. 저도 이렇게 여유 있는 생활이 참 좋아요.


제가 돈이 없지 마통이 없나요. 괜찮아요, 저는!


여러분도 용기를 내보세요.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가까운 지인에게서 ‘의외의 쓸모’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어요. 저보다도 저희 아이들이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답니다.


도자기 만들기 체험을 하던 날, (엄마 아님 주의, 강사님이심)


4인 가족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할아버지와 함께.


핸드폰을 사러 가던 날, 아빠랑 셋이서.


할머니댁에서 김장하던 날, 아빠랑 셋이서.


드디어 엄마 출연? 노! 자세히 보면 점원(명찰 패용하심)


집에서 누워서 영화를 볼 때조차도, 아빠랑 셋이서.


드디어 엄마 등장, 눈사람 완성 직후 기념사진 촬영을 위해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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