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였던 나는 당연히 '수학'이 어렵고 힘들었다. 내가 학교 다니던 당시만 해도 '정석'을 한 권 다 푸는 게 수학 공부의 정석이었는데, 수학 잘 못하는 아이들이 그렇듯이 나의 정석은 언제나 앞부분만 손때가 타있었다.
늘 다이달로스의 미궁과 같던 수학, 하지만 정작 입시 수학을 지나, 대학에 가서 아르바이트로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다시 '정석'을 열었을 때 놀라운 경험을 했다. 가끔 스트레스를 받으면 '수학' 문제를 푼다해서 일반인들을 놀래키는 이들이 있는데, 그 수학 문제를 풀 때의 카타르시스를 나 역시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가장 순수한 지적인 열정과 그에 따른 보상으로서의 '해제'에 이르렀을 때 주어지는 쾌감, 그걸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쉬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풀리지 않았을 때이다. 모짜르트, 베토벤, 고갱, 고흐, 헤밍웨이 등등 우리가 아는 이른바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위인들 중 다수가 풀리지 않는 자기 삶의 화두로 인해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미술, 음악, 그리고 수학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천재성만큼 그들의 풀리지 않는 열정이 그들을 '깊은 우울'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신경생물학자인 제임스 펄롱은 깊은 우울감은 동시에 '창조의 에너지'가 된다고 실험을 통해 밝혔다. 르네상스 화가인 알프레드 뒤러의 '멜랑콜리아'는 컴퍼스를 손에 든 채 수학정 상징이 가득한 공간 안에서 고민에 빠진 작가 자신을 상징하는 듯한 인물을 그린다.
그런데 승유가 차마 숨기지 못한 수학에의 순수한 열망을 눈밝게 알아본 이가 있다. 바로 아성고에 새로 부임한 수학 교사 지은수(임수정 분)이다. 그녀가 칠판에 쓴 채 미처 지우지 못한 문제에 흔적을 남긴 승유, 그 문제 풀이의 흔적을 보고 그녀는 알았다.
지은수가 승유를 알아본 이유는 무얼까? 그건 바로 그녀도 '승유' 같은 사람이어서다. 학교 선생님이라지만 여전히 고등학생처럼 맑은 눈빛으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그녀는 수학의 난제 앞에서 가슴이 뛰는 '수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입시 명문 아성고의 교사로 왔지만 아이들이 수학에 이용당해서는 안된다며 수학의 아름다움을 가르치고 싶다.
그래서 지은수는 자신이 발견한 백승유에게 너도 수학을 '즐겼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밤새워 칠판을 채워가며 문제를 푼다. 그저 '푸는 과정'을 즐겼으면 한다고 했지만 승유의 세상에는 온통 풀지 못한 문제들로 채워진다. 마치 천재들의 만들어낸 음악과 미술, 갖가지 지적인 결과물들이 우리에게는 그 아름다움으로 비춰지지만 그들에게는 우울과의 지난한 싸움의 과정인 것처럼. 과학고 전입 시험지 뒷면에 자신의 빠진 문제를 풀어내버리듯 말이다.
하지만 정작 백승유로 하여금 온전히 수학에 빠져들지 못하게 만드는 건 그를 둘러싼 세상이다. 12살에 세상에서 사라진 천재였던 아들을 여전히 놓지 못하는 부모님은 승유에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냐며 폭력을 불사한다. 부모는 천재 백민재를 기대하지만 그런 부모의 태도가 바로 백승유가 백민재로 살 수 없었던 이유일 수도 있다.
거기에 수학을 사랑하고, 수학의 아름다움을 아이들과 나누고 싶지만 현실은 입시 명문 아성고의 교사가 된 지은수처럼, 수학은 아름다운 학문이 아니라 올림피아드와 '수포자'라는 양 극단을 오가는 입시의 '수단'에 불과하게 만든 교육 현실이 천재 백승유와 순수한 열정을 가진 지은수에겐 헤쳐나가기 어려운 또 하나의 '미궁'이다.
<멜랑꼴리아>는 천재성이 '박제'당한 백승유와 그를 알아본 열정적인 수학 선생 지은수를 통해 진정성이 사라진 채 입시라는 수단이 되어버린 교육과 아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한다. 물론 한편에서는 입시 명문 아성고와 입시에 매달린 부모와 아이들이라는 이제는 하나의 장르가 되어가는 입시 스릴러의 또 하나의 버전이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부디 <청담동 앨리스>로부터 <의사 요한>에 이르기까지 신선한 스토리를 변주해온 김지운 작가와 <여신강림>의 김상협 피디의 시너지가 제대로 이루어지길 기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