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스캔들>
지인으로 부터 카톡이 왔다.
'전도연 청바지 사려고 하는데.....'
지난 겨울 만나 해가 바뀌고 봄이 오면 그때부터 살을 빼자고 서로 독려했던 처지였다. 겨울잠을 자는 곰도 아닐진데, 해마다 겨울녘이 되면 야곰야곰 오르는 살, 이 나이에 살이라 하면 그게 다 뱃살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렇게 두툼한 몸에 전도연 청바지라니.
어디 카톡을 한 지인뿐인가. 다들 난리란다. 여성 옷을 파는 포탈에 때도 아니며 핏이 딱 떨어지는 청바지들이 등장한다. 드라마가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조거 팬츠와 통바지가 유행인 세상에 그녀의 스타일이 좀 올드하지 않나 했는데 회를 거듭할 수록 가뿐한 그녀의 스타일이 눈에 들어온다.
'근데 저 청바지 우리한테는 불가능한 옷이예요'
그녀가 불철주야 동네 운동장을 돌며 꾸준하게 몸을 만들어 왔다는 걸 알았기에 지인을 말렸다. 예전에 배우 이미숙이 작품이 없을 때에도 하루 대여섯 시간씩 운동을 하다 이 나이에 내가 뭔 팔자냐 하고 한탄을 하기도 했다던데, 오랜만에 돌아온 오십 줄의 전도연이 서른 중반의 주인공 역할을 거뜬하게 소화해내며 그녀의 '핏'한 의상마저 붐을 이루게 만드는 상황이 반가웠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처럼 밝고 씩씩한 캐릭터로 돌아온 그녀가 반가웠다.
오래 전 전도연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릴 무렵 주말 드라마 속 그녀는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는 의연한 캐릭터로 자신을 알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접속>을 통해 당대 젊은 여성의 아이콘으로, <내 마음의 풍금> 속 늦깍이 학생으로 확장 변주되었고 <너는 내 운명>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런데 그 밝고 화사했던 전도연이란 배우가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알릴 수록, 그녀의 이름값이 높아질수록 그녀가 맡은 캐릭터들은 그에 비례하여 심각해져 갔다. 허긴 세상의 내로라하는 사연들이 영화와 드라마가 되는 것이니...... 그녀는 예민해졌고, 거칠어졌으며, 우울해졌다. 그런 캐릭터들이 안어울렸다는 게 아니라, 전도연이라는 배우가 가진 다채로운 스펙트럼 중 한쪽의 측면들만이 소모되는 것같아 답답했다. 그러다 돌아온 <일타 스캔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청바지처럼 그녀가 자신에게 모처럼 딱 맞춤한 캐릭터로 돌아온 듯해서 보는 게 편하다. <오, 나의 귀신님>, <역도 요정 김복주> 등 여성 캐릭터를 잘 그려낸 양희승 작가와 <갯마을 차차차>의 유제원 피디의 조합이 전도연이란 배우가 가진 긍정적 에너지를 제대로 살려낸다.
극중 전도연은 일타 강사 최치열이 저장한대로, 호남선도 아니고, 남행선이다. 한때 핸드볼 국가대표였던 그녀는 식당을 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졸지에 가장이 된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남동생과 언니가 떠맡기고 가버린 어린 조카가 그녀의 몫이 되었다. 그리고 결혼도 하지 않은 어린 이모는 조카를 딸 삼아, 남편이 외국에 돈 벌러간 반찬집 사장님이 되었다. 그러다 일타 강사 최치열과 엮이며 로맨스의 주인공이 된다.
병약미의 아이콘이 된 남자 주인공에 대비되어, 극중 전도연이 맡은 캐릭터 남행선은 그녀의 캐릭터 소개에서 벌써 알 수 있듯이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 하는 '캔디'같은 캐릭터이다. 거기에 오토바이를 타고 새벽시장에서 부터 학원에 늦은 남자 주인공을 실어나르고, 자신의 딸이 학원 소수정예 반에서 떨려나자 홀로 학원 앞에서 시위를 할 정도로 '걸크러쉬'한 존재이다.
물론 극중 남행선의 매력이 처음부터 드러난 것은 아니다. 자신의 딸이 고 3인데 입시 상황에 대해 무지하거나 맹목적인 설정들이 '민폐'가 아닐까 싶게 우려되는 상황들도 등장했다. 하지만 그런 해프닝들을 그 어떤 상황에서도 씩씩하게 헤쳐나가는 모습을 통해 멋들어지게 상쇄시켜 나갔다.
무엇보다 사랑에 빠진 여주인공들이 '사랑밖엔 난몰라'하듯이 맹목적이 되는 전통적인 로맨스물의 맹점을 <일타 스캔들>은 현명하게 피해간다. 남주인공 최치열이 병약하지만 자신에게 닥친 문제들에 수학 강사답게 사리분별있게 해결해 나가듯이, 여주인공 남행선 역시 동생이 우려하는 바, 한번 맘 먹으면 '커브없는 직진'의 스타일임에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둔감하지 않다.
최치열, 지동희와 함께 간 요트 여행에서, 지동희의 의도적이고도 급격한 턴으로 사고를 입은 남행선이 예리하게 지동희의 의심스러운 면을 포착한다던가, 남행선이 가져간 음식을 대놓고 버리는 행위에 대해 당당하게 항의하는 장면이 사원시원하다. 말이 최치열, 남행선의 로맨스물이지, 학원가를 배경으로 하여 학원물의 성격을 띠고 있는 <일타 스캔들>은 자살, 살인,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자극적 소재를 담고 있다. 마지막을 앞두고 남행선의 딸 해이가 교통사고로 의식불명이 되는가하면, 그 다음 회에 범인이던 지동희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식이다. 그 와중에 등장하는 학부모들은 자기 아이를 위해 시험지 유출에, 여론몰이, 항의시위 등 소시오패스 급 행동들을 일삼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타 스캔들>이란 드라마를 보는 데 있어 피곤함을 느끼지 않게 되는 이유는 두 주인공 캐릭터의 매력이 크다. 자신의 딸을 위해 어떻게든 남행선을 흠집내려 애쓰던 수아모가 선재를 퇴학시키기 위해 학교 운동장을 세놓은 듯이 시위를 할 때 '직설'을 마다하지 않던 그녀가, 팔을 다친 채 병원에서 쩔쩔매던 수아모를 도와주는 장면은 '복수물'의 장르가 되어버린 학원물의 돌파구를 열어 반갑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병약하지만 비겁하지 않고, 씩씩하지만 맹목적이지 않다. 특히 일타 강사와의 스캔들 주인공이 되며, 불륜녀에서 미혼모, 그리고 미담의 주인공이라는 '롤코'를 겪는 와중에서 자기 비하없이 의연함을 잃지 않는 남행선이란 캐릭터는 매력적이고, 그런 남행선은 전도연이기에 살아난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위한 진심, 그리고 자신이 옳은 바를 위한 헌신의 순간, 그 순간을 드러내는데 있어 전도연의 연기는 발군이다. '무방비한 진심'의 순간이랄까. 그런 순간을 표현하는데 있어 전도연의 연기는 그 어떤 색채로도 칠할 수 없는 순수의 영역처럼 보여진다.
배우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지만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 조선남녀 상열지사>란 영화가 그저 범속한 인간사의 속내를 드러내는 지점을 넘어설 수 있도록 하는 지점에 전도연이 분한 숙부인 정씨가 있다. 영화의 절정은, 한겨울 강가에서 자신을 놓던 그 순간, 전도연의 얼굴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신의 용서에 대항하는 신애가 되고, <하녀>의 은이로 변주된다.
복수로 가면 끝없이 무자비해지고, 사랑으로 가면 한없이 순정이 되어버리는 자신을 던지는 진심, 그러기에 작품들은 그녀를 늘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진심이 그런 면에서만 빛을 발하는 건 아니다. <일타 스캔들>이 반가운 건, 그런 전도연이 가진 진심의 연기가 생활 속에서도 충분이 그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지점을 다시 말해주는 드라마여서이다. 반찬 가게를 하며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그녀는 충분히 화사하다. 왜 그런 반가움 있지 않은가. 내 곁에 저런 순수한 사람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그런 사람말이다. 앞으로도 치명적이지만은 않은 우리네 곁의 캐릭터로 종종 찾아와 주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