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저녁 무렵 빗줄기가 잦아들었지만, 도심의 골목과 도로에는 여전히 습기가 남아 있었다. 회사 창문에는 물방울이 길게 흘러내린 자국만 남았다.
진서는 마지막 보고서를 전송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형광등의 흰빛이 오래된 커피 잔과 서류를 무채색으로 덮었다. 사무실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야근 메신저 알림을 끄고 코트를 집어 들었다. 팀장이 퇴근하며 남긴 “고생했어”라는 말은 자동 발송 안내 문자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엘리베이터 홀로 이어지는 복도에는 청소 직후의 물비린내와 락스 냄새가 남아 있었다.
바닥은 막 걸레질한 듯 번들거렸다.
진서는 1층 버튼을 눌렀다.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는 동시에, 설명하기 힘든 공허가 가슴을 스쳤다.
‘딩’—
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그의 뺨을 스쳤다.
거울 속 얼굴은 창백했고, 눈 밑은 퀭했다. 셔츠 칼라는 습기에 젖어 목을 간질였다.
엘리베이터는 부드럽게 내려가다 9층과 10층 사이에서 갑자기 멈췄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충격은 거의 없었지만, 귀 안쪽에서 얇은 금속 진동이 퍼졌다.
표시등의 ‘10’은 켜진 채, 초록색 점이 느리게 깜빡였다. 기계의 호흡이 어긋난 듯 시간의 흐름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진서는 숨을 고르고 비상벨을 눌렀다.
삐— 긴 신호음 뒤, 스피커에서 여자 상담원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객님, 9층과 10층 사이에 계시죠?”
“네… 어떻게 아세요?”
“CCTV로 확인 중입니다. 곧 움직일 거예요. 그대로 계세요.”
목소리가 이상했다. 그가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다음 말이 먼저 들려왔다.
“금방 이동합니다. 걱정 마세요.”
심장이 불규칙하게 두근거렸다.
앞질러 나오는 음성에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천장 어딘가에서 미세한 ‘툭’ 소리가 났다. 금속이 체온을 잃어가듯 공기가 한결 차가워졌다.
모터음이 다시 깨어났다.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계가 깊게 숨을 들이쉬는 듯한 저주파 울림이 샤프트를 타고 올라왔다.
‘딩—’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형광등이 환히 켜진 10층 복도의 빛이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진서는 안도하며 한 발을 내딛었다.
발끝이 공중을 밟았다.
문 밖은 복도가 아니었다. 끝없는 어둠, 아무것도 없는 낭떠러지였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숨이 뚝 끊겼다.
등줄기를 따라 한기가 내리꽂혔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혀 간신히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차가운 금속 바닥이 발뒤꿈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종아리가 떨렸다.
그때 스피커에서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흘렀다.
“…아깝네.”
방금 전 상담원과는 전혀 다른 음색이었다.
따뜻함도, 안내의 친절도 없는 얼음 같은 한마디.
엘리베이터 안 공기가 한순간 더 차가워졌다.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배어 미끄러웠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정적에 잠겼다.
금속 벽이 숨을 멈춘 듯 차가웠다.
그리고— 비상등이 한 번 깜빡이더니 조명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초록색 표시점만이, 아주 느린 호흡으로 살아 있었다.
쾅! 쾅! 쾅!
갑작스러운 금속 타격음이 고막을 찔렀다.
“119입니다! 안에 계십니까?”
굵은 남성의 목소리.
문 틈으로 강제 개방 도구가 삐걱거리며 들어왔다. 서늘한 바람이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문이 천천히 벌어지자, 노란 안전 조끼를 입은 구조대가 손을 내밀었다.
진서는 떨리는 손으로 그 손을 붙잡았다. 무릎에는 아직 힘이 덜 돌아왔다.
10층 복도는 평범했다.
매끈한 타일, 안전등, 흔한 형광등 불빛.
방금까지의 낭떠러지는 그림자도, 냄새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현실은 언제나 이렇게 무덤덤했다.
구조대원이 상태를 묻고 무전을 치는 동안,
문이 닫히기 직전 아주 미세한 숨소리가 스피커에서 스쳤다.
“…다음엔 꼭.”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달렸다.
진서는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봤지만, 철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요히 닫혔다.
표시등은 평온하게 1층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도 한동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빌딩 바깥 공기는 차갑고, 빗내음은 이미 잦아들었지만,
귓가에는 여전히 그 낮은 속삭임이 남아 있었다.
“…아깝네.”
그 한마디가 엘리베이터 샤프트보다 깊게,
진서의 귓속에서 천천히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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