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은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 803호였다. 두 층 위 1003호에는 동네에서 소문난 잉꼬부부가 살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늘 먼저 인사하던 사람들. 아저씨는 안경 너머로 눈웃음을 지으며 “학교 가니?” 하고 묻었고, 아주머니는 내가 들고 있는 미술 도구를 보며 “이번엔 뭘 그릴 거니?” 하고 살갑게 말했다.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때까지는.
그날 아침, 비가 조금씩 흩날렸다. 교복 셔츠에는 다림질 자국이 반듯했고, 운동화 끈은 한 번 더 꼭 묶었다. 8층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조금 늦은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안에는 아저씨가 서 있었다. 검은 양복, 잘 매어진 네이비 넥타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내 손에 들린 사회책을 힐끗 보던 눈길.
목소리는 평소처럼 부드러웠다. 아저씨가 지하 주차장 ‘B1’을 눌렀고, 나는 ‘1’을 눌렀다. 문이 닫히는 동안 아저씨는 반 걸음 물러서 내 자리를 열어 주며 미소를 지었다. 그 짧은 틈에 하나가 걸렸다. 양복 안주머니가 미세하게 불룩했다. 손목의 셔츠 커프스는 살짝 젖어 있었다. 비 때문이겠지, 하고 넘겼다. 그때 코끝을 스친 아주 옅은 냄새—쇠처럼, 락스처럼—정확히 꼬집기 어려운 금속성 냄새였다.
아저씨는 무심한 농담처럼 말하고 눈웃음을 지었다. 엘리베이터 벽의 스테인리스가 우리 얼굴을 흐리게 반사했다.
1층에 먼저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아저씨는 내 앞에서 반걸음 물러섰다.
나는 가볍게 목례하고 내렸다. 등 뒤에서 아저씨가 말했다.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도 지나치게 정확한 톤으로, 교과서 예문처럼 균일하게 들렸다. 문이 닫힐 때 아저씨의 오른손 엄지는 ‘닫힘’ 버튼에 닿아 있었다. 오래된 엘리베이터는 문이 완전히 닫히기도 전에 곧장 내려갔다. 작은 상자 안에서 아저씨는 아주 인자한 얼굴로 어둠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경비 아저씨 옆에 경찰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누군가 다급히 오르내렸다. 나는 운동장 먼지를 턴다는 마음으로 신발을 툭툭 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그때 복도 끝에서 아주머니의 친구라는 분이 울먹이며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자 경찰 두 명이 타고 있었다.
내가 말하자 경찰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목시계를 보며 기억을 거꾸로 더듬었다.
경찰은 메모장에 적더니 가볍게 “고마워.” 하고 내렸다. 문이 닫힐 때 경찰 신발에는 물기가 반짝였다.
그날 밤 TV 속보가 떴다. 그건, 아내의 불륜을 알아챈 남편이 준비해 온 복수였다. 10층에서 살인 사건. 용의자, 남편. 검거. 자막 밑에 흐르는 자잘한 글자들이 스치자 손끝이 얼음처럼 식었다. 아침에 웃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앵커는 “도주 중인 남편을 자택 인근에서 검거—양복 안주머니에서 범행 도구로 추정되는 흉기 발견—CCTV 분석이 결정적—”이라고 말했다.
뉴스 화면 우측 상단에 우리 아파트 로비가 떴다. 07:34:58. 문이 열리며 나와 그가 함께 서 있었다. 다음 프레임에서 나는 내리고, 그는 엄지를 ‘닫힘’에 올린 채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영상은 조용했다. 화면 속 우리는—아무 일도 없던 사람들이었다.
밤이 되자 엄마가 물었다.
“그 아저씨랑 아는 사이니?”
그 말을 하고 나서 침묵이 길어졌다. 인사했다는 사실이 칼날처럼 마음을 베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잘못한 것 같은 기분.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와 냉장고 콤프레서가 번갈아 울었다. 소리 사이사이에 아침의 금속성 냄새가 낀 듯 떠올랐다.
며칠 뒤, 학교 앞 분식집에서 친구들이 그 이야기를 꺼냈다.
큰일. 어떤 큰일.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없었으면—나한테 뭐가 일어났을까. 그 아저씨는 그날 과하게 친절했고, 불편할 만큼 정확했고, 지나치게 정상적이었다. 그 ‘지나침’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내가 가진 정상의 기준을 뒤집어엎었다.
그날 아침, 문턱을 넘기며 버릇처럼 뒤를 한 번 돌아봤다. 문틈 너머로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었다. 엄지는 ‘닫힘’에, 검지와 중지는 버튼 아래 스테인리스 틈에 걸쳐 있었다. 그때 문틈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이상하게도 “먼저 가”라는 말이 주문처럼 들렸다.
아파트 단지에는 곧 CCTV 추가 설치 안내문이 붙었다. 주민들은 안전을 말했고, 경비실에는 따끈한 캔커피가 쌓였다. 아주머니의 장례는 조용히 치러졌다고 했다. 나는 장례식장에 가지 않았다. 갈 용기도, 할 말도 없었다. 대신 그날 이후로 매번 ‘열림’을 먼저 눌렀다.
엘리베이터에 혼자 타면 문을 억지로 더 오래 열어 두었다. 누군가 올 것 같아도 ‘닫힘’은 쉽게 누르지 않았다. 내 엄지가 ‘닫힘’ 표식 위를 지나갈 때마다 버튼 표면의 미세한 오목함이 살을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 오목함은 내가 알고 있던 예의와 인사의 모양과 닮아 있었다.
가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중학생 교복을 입고 있다. 문이 열리면 아저씨가 서 있다. 동일한 미소. 동일한 안경테. 양복 안주머니가 조금 불룩하다.
우리는 함께 탄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간다. 8, 7, 6—어느 층에서도 서지 않는다. 그는 묻는다.
대답하지 않는다. 그가 말한다.
그 말에 엘리베이터가 멈춘다. 어둡고 빈 층. 숫자가 없다. 문이 열리려다 말고 다시 닫힌다. 그의 엄지는 ‘닫힘’에 닿아 있다. 나는 ‘열림’을 찾지만 손가락이 단추 위에서 미끄러진다. 표면이 젖은 금속처럼 미끄럽다. 문틈 사이로 종이같이 얇은 공기가 들어온다. 냄새가 없다. 냄새가 없다는 냄새만 있다. 그때 눈이 떠진다.
한동안 나는 인사의 의미를 생각했다. 우리 아파트 사람들은 서로의 이름을 모른 채 잘 인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상자처럼 좁은 침묵을 작은 친절로 덮는 법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먼저 가세요.” “좋은 하루.” 그 말들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들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그 말들이 ‘닫힘’과 ‘열림’ 사이에 묶여 있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에게는 열림이고, 누군가에게는 닫힘인 말들. 누군가에게는 살려 주는 말이고, 누군가에게는 보내는 말.
몇 달이 지나 엘리베이터 내부 안내판이 바뀌었다. CCTV 안내 문구가 더 크게 붙었고, 버튼 조명은 새것처럼 밝았다. 관리사무소는 ‘안전한 아파트’라며 공지를 올렸다. 나는 안내판을 읽다가 벽면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 키가 조금 컸고, 눈 밑은 덜 꺼졌다. 문이 열렸다. 버릇처럼 뒤를 한 번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문턱을 넘기 직전, 아주 예의 바르고 부드럽고 정확한 톤의 목소리가 귓 볼에 닿았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한 발, 또 한 발. 복도에 서자 문이 천천히 닫혔다. 닫힘이 완성되기 직전, ‘닫힘’의 오목함이 손끝을 스쳤다. 나는 ‘열림’을 살짝 훑고 지나갔다. 버튼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언젠가 누군가는 그 버튼을 누를 것이고, 언젠가 누군가는 그 버튼을 잡을 것이라는 걸.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인자한 얼굴들이 서로에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할 것이라는 걸.
나는 계단으로 향했다. 조용한 복도에 사람 발자국 소리가 하나뿐이라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내려가는 동안 머릿속에 뉴스 자막 한 줄이 다시 떠올랐다.
만약 그게 없었더라면—. 문턱을 내려 잠깐 서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바람이 뺨을 스쳤다. 그 바람은 냄새가 없었다. 냄새가 없어서 오래 머물렀다. 오래 머무르니, 오래 기억되었다.
그 이후로도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똑같은 말, 똑같은 미소. 나는 안다.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그 말들이, 어떤 날은 열림이고 어떤 날은 닫힘이라는 것을. 그리고 어떤 날에는, 문턱에서의 인사가—사람을 살리기도, 삼키기도 한다는 것을.
제보 : tellmeyoursecret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