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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 “할머니는 왜 나만 예뻐해?”

[창작동화] 사랑의 샘물 - 에리히 프롬, 아가페, 스토르게

by 오이랑

[대화의 발견]


여섯 살 딸아이가 대뜸 선언했다.


"엄마, 나는 커서 아기 안 낳을래요."


저녁을 먹고 각자 책을 보던 조용한 거실이었다. 나는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어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의 표정은 장난기가 아닌, 어떤 결심을 한 사람의 그것처럼 진지했다.


"왜?"


내 물음에 아이는 자기가 세운 가설을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첫째, 자신이 아기를 낳으면 그 아기는 자신보다 '더 귀여울' 것이다.

둘째, 할머니의 사랑은 '더 귀여운 존재'에게로 옮겨간다.

셋째, 그 증거로 현재 할머니는 엄마인 나보다 손녀인 자신을 '더 사랑한다'.


결론적으로, 미래에 태어날 아기에게 모든 사랑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신은 출산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아이의 논리는 명료했고, 그 안에는 나름의 인과관계와 증거까지 갖춰져 있었다. 특히 마지막 증거를 댈 때, 아이는 내 눈치를 살폈다. 이 말이 엄마를 슬프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사랑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며,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샘물과 같다'는 추상적 개념을 여섯 살 아이에게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가. 건조한 설명은 아이의 마음에 가닿지 않을 터였다. 논리가 아닌,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했다.


결론은 이야기였다.




[창작 동화] 사랑의 샘물

여섯 살, 봄

은이의 세상은 온통 외할머니로 가득 차 있었다. 회사에 다니는 엄마는 이른 아침에 나가 별이 뜰 때쯤 돌아왔고, 그 빈자리는 늘 할머니의 따스한 온기로 채워졌다. 할머니는 은이의 밥을 챙기고, 그림책을 읽어주고, 해가 좋은 날이면 놀이터 그네를 힘껏 밀어주었다.


"우리 강아지, 우리 예쁜이!"


할머니의 입에선 꿀 같은 칭찬이 흘러나왔고, 양손에는 늘 은이가 좋아하는 딸기 맛 사탕과 공룡 모양 젤리가 들려 있었다. 은이는 할머니의 넘치는 사랑이 좋았지만, 문득문득 현관문 쪽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쓸쓸한 눈빛을 볼 때면 마음 한구석이 콕콕 쑤셨다.


늦은 밤, 피곤에 지쳐 돌아온 엄마에게 할머니는 "왔냐. 밥은 먹었고?" 하는 무뚝뚝한 한 마디를 건넬 뿐이었다.


은이는 생각했다.

'원래 할머니의 사랑은 전부 엄마 거였을 텐데. 더 작고, 더 귀여운 내가 태어나서 할머니의 사랑을 모두 빼앗아 버린 거야.'

사랑은 제일 귀여운 사람에게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은이는 굳게 믿었다.


그래서 그날 밤, 잠자리에서 엄마가 "우리 딸,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 하고 물었을 때, 은이는 비장하게 선언했다.


"나는 결혼도 안 하고, 아기도 절대로 안 낳을 거야."

"어머나, 왜?"


은이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아기를 낳으면… 그 아기가 나보다 더 귀여울 거잖아. 그럼 엄마도, 할머니도 그 아기만 사랑하게 될 테고… 그럼 엄마는 할머니 사랑도 못 받고, 내 사랑도 못 받게 되잖아. 나는 엄마가 외로워지는 게 싫어."


여덟 살, 여름

은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여름, 장맛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는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 순간, 늘 은이만 챙기던 할머니의 눈빛이 달라졌다. 할머니는 "아이고, 내 새끼!" 하며 달려가 젖은 수건으로 엄마의 이마를 닦고, 얇은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부엌에서는 금세 따뜻한 죽이 끓었고, 할머니는 "네가 이러니 내가 속이 상해, 안 상해! 밥도 제때 안 챙겨 먹고 다니지!" 하며 애정 섞인 잔소리를 쏟아냈다.

엄마는 아픈 와중에도 아이처럼 할머니에게 기댔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이는 혼란스러웠다. 할머니의 사랑이 자신에게 전부 옮겨온 것이 아니었다. 엄마를 향한 할머니의 사랑은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꼭 필요할 때 샘물처럼 솟아나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주는 사랑이 알록달록한 사탕 같다면, 엄마를 향한 사랑은 아플 때 먹는 따뜻한 죽 같았다.


열 살, 겨울

눈이 펑펑 내리던 겨울밤, 세 식구는 거실에 둘러앉아 낡은 앨범을 보고 있었다. 앨범 속에는 은이만 한 시절의 엄마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할머니는 사진 속 엄마를 보며 "이때 우리 딸이 동네에서 제일 예뻤지. 재롱도 잘 부리고." 하며 추억에 잠겼다.


사진 속 엄마는 지금의 은이만큼이나 사랑스러웠다. 그때 엄마가 은이의 어릴 적 걱정을 기억한다는 듯,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봐, 할머니는 엄마가 이렇게 어릴 때도 많이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지? 엄마가 너를 낳았다고 해서 할머니 사랑이 줄어들지 않았어. 오히려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다랗게 생겨난 거야."


엄마는 은이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엄마는 여전히 할머니의 사랑스러운 딸이고, 너도 나중에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딸이란다. 사랑은 샘물 같아서 마르는 법이 없거든."


열 살이 된 은이는 이제 안다. 사랑은 빼앗거나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다른 모양으로, 다른 깊이로 존재하는 것임을. 할머니의 따뜻한 죽과 달콤한 사탕을 모두 맛본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이야기에서 우린 사랑에 대한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보며 고민을 해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한정된 자원인가, 아니면 무한한 샘물인가?

이야기의 핵심 질문입니다. 은이는 사랑을 '가장 귀여운 사람'에게 옮겨가는 한정된 에너지와 재화로 생각합니다. 반면 엄마는 사랑을 '새로운 사람이 생기면 더 넓고 깊어지는 샘물'에 비유하죠. 이는 사랑을 바라보는 두 가지 근본적인 관점, 즉 제로섬(zero-sum) 관점과 포지티브섬(positive-sum) 관점의 충돌을 보여줍니다.


사랑의 총량은 정해져 있는가?

한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줄어드는 것일까요? 만약 사랑의 총량이 일정하다면, 새로운 자녀의 탄생이나 새로운 관계의 시작은 기존 관계의 위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야기는 이 '사랑 총량의 법칙'이라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사랑은 하나의 감정인가, 여러 형태의 관계를 지칭하는 이름인가?

할머니가 손녀에게 보여주는 애정(다정함, 칭찬)과 딸에게 보여주는 애정(묵묵한 챙김, 걱정)은 표현 방식이 다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랑이 단일한 감정이 아니라, 관계와 대상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발현되는 복합적인 현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무한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존재인가?

어머니의 '샘물' 비유는 인간의 사랑의 잠재력이 무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는 인간의 이타성과 관계 확장의 능력에 대한 철학적 탐구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 교과의 '생명과 윤리'단원에서 다뤄집니다.

특히 에리히 프롬(Erich Fromm)과 고대 그리스 철학의 개념을 통해 이야기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과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

독일의 사회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단순한 감정이 아닌, 배워서 익혀야 하는 '기술(art)'이라고 주장합니다.


프롬은 미성숙한 사랑이 '받는 것'에 집중하는 반면, 성숙한 사랑은 '주는 것'에서 기쁨을 찾는다고 말합니다. '주는 행위'는 나의 생명력과 잠재력이 넘쳐흐른다는 가장 높은 표현이며, 주는 것을 통해 나의 풍요로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사랑을 주면 줄수록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커지고 깊어진다는 '사랑의 샘물' 속 엄마의 설명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프롬에 따르면 아이의 걱정은 사랑을 '받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 미성숙한 단계의 사랑인 거죠.


또 프롬에게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입니다. 특정 대상을 만나야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한 사람(엄마)을 사랑하는 동시에 또 다른 사람(아이)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사랑이 특정 대상에게 종속되거나 이전되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사랑의 모습 (Agape, Storge)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랑을 여러 형태로 구분했는데, 이 개념을 통해 '사랑의 샘물'에 나타난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족 간의 사랑, 특히 부모 자식 간의 자연스러운 애정을 의미합니다. 이야기 속 할머니-엄마-아이로 이어지는 3대의 사랑은 바로 이 '스토르게(Storge, στοργή)'에 해당합니다. 할머니가 딸을 묵묵히 챙기는 것과 손녀를 귀여워하는 것 모두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그 뿌리는 '스토르게'라는 깊은 가족애에 있습니다.


아가페(Agape, ἀγάπη)는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종종 신의 사랑에 비유되지만, 인간관계에서는 이해타산을 넘어선 헌신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설명하는 '샘물과 같은 사랑'은 바로 이 '아가페'의 속성과 닮아있습니다. 새로운 존재의 등장으로 인해 기존의 사랑이 줄어드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사랑으로 모두를 품으려는 태도는 아가페적 사랑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교실의 철학 수업]


'생활과 윤리' 시간.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대한 설명을 마친 뒤, 나는 준비한 동화 '사랑의 샘물'을 화면에 띄웠다.


"오늘은 좀 특별한(?) 텍스트를 읽어볼 거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교실 뒤편에서 몇몇이 반사적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아, 쌤, 글 읽는 거요?" 스크린에 동화 제목이 뜨자 키득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별다른 설명 없이 이야기를 읽어 내려갔다. 웅성거리던 교실은 이야기 속 주인공이 "나는 결혼 안 할 거야!"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잠시 조용해졌다. 몇몇 학생이 처음으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토론을 제안하자,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모범 답안 같은 분석을 내놓았다.

"은이의 관점은 사랑을 소유하려는 미성숙한 사랑이고, 어머니의 샘물 이론이 프롬의 생산적 사랑에 해당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학생이 말을 받았다.

"결론: 사랑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고 확장형 서버네. 신규 유저 들어온다고 기존 유저 계정 삭제 안 함."


그 말에 교실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분위기가 풀리자 다른 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저는 이야기가 너무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는 부모님의 시간과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원이 한쪽으로 쏠리는 '편애'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평소 시니컬하던 B의 의견이었다.


날카로운 지적에 잠시 토론이 이어졌다. 학생들은 자신의 형제 관계를 예로 들며 B의 의견에 동조하거나 반박했다. 그러다 한 학생이 화제를 돌렸다.

"이거 완전 친한 친구가 여자친구 생겼을 때랑 비슷한 거 아니냐? 괜히 서운하고 그런 거."


그 말에 몇몇이 "아, 맞네"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토론의 방향이 교과서 밖, 자신들의 관계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던 중, 창가에 앉아 조용히 듣고만 있던 학생이 혼잣말처럼 툭 던졌다.


"아, 씨... 그냥 엄마 보고 싶네."


소란스럽던 교실이 그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다들 말이 없었다.


아이들은 그제야 깨달은 것 아닐까? 교과서에 박제된 '사랑의 기술'이란, 매일 저녁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끓여주고, 가끔은 등짝을 후려치기도 하는 우리 엄마의 서툰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사랑의 샘물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작은 노력 속에서 퐁퐁 솟아나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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