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2일 오후 3시 58분. 백두산 정상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듯 고요했다. 사람의 발자국은커녕 바람조차 머뭇거리는 듯 멈춰 있었고, 분화구의 얇은 수증기층은 잠든 거인의 입김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평화가 아니라, 폭발 직전의 ‘숨 고르기’였다. 산 아래 마을의 새들이 갑자기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흩어졌고, 숲 속의 짐승들이 너구리굴과 바위틈에서 뛰쳐나와 남쪽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인간이 감지하지 못하는 어떤 신호가 이미 대지를 통과하고 있었다.
3시 59분 12초. 지하 10킬로미터 아래에서 마치 쇠망치가 바위를 내리치는 듯한 섬광이 번쩍였다. 그 빛은 땅 위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곧바로 진동의 파동이 터져 올라왔다. 백두산은 울기 시작했고, 그 울림은 소리가 아니라 ‘경고’였다.
분화구 인근의 경사면에서 나무들이 가장 먼저 흔들렸다. 진동이 커지자 뿌리가 흙 밖으로 들려 올라갔고, 곧바로 치솟은 고열 가스에 표면이 일순간에 검게 그을리며 사라졌다. 연기가 번지기도 전에, 땅 전체가 붉은 열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땅이 갈라지며 불덩어리가 솟구친 것이다.
첫 폭발은 소리가 아니었다. 빛과 열, 그리고 충격의 감각이 먼저였다. 붉은 수증기 기둥이 하늘을 찢어 올렸고, 산은 마치 자신의 피를 토하듯 진홍빛 열기를 뿜어냈다. 뒤늦게 도달한 굉음은 북쪽 산맥을 통째로 흔들었다. 굉음은 귀를 넘어 가슴과 폐를 때리는 고막 없는 울림이었고,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게 ‘지금 도망치라’는 명령을 쏟아내는 하나의 진동이었다.
화산재는 먼저 빛을 지워버렸다. 세상은 순식간에 회색으로 물들었고, 짧은 정적 후에 화쇄류(Pyroclastic Flow)가 나타났다. 온도 800도, 속도 시속 320킬로미터. 인간이 만든 그 어떤 탈출 수단도 이 속도를 이길 수 없었다. 그것은 자연의 분노가 아니라, 시간 자체를 집어삼키는 괴물이었다. 눈으로 본다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재는 공기보다 무거웠고, 공기 자체가 불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뒤로! 뒤로 물러서라!”라고 경비대 중사가 소리쳤지만, 이미 그의 목소리는 화산재에 묻혀 소리의 형태를 잃고 있었다. 병사 한 명이 달리기 시작했고, 그의 발밑에서 대지가 녹으며 들끓는 마그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몸 전체가 불꽃처럼 타오르며 사라졌다. 이는 ‘죽음’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소멸이었다.
용암 분출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공기의 붕괴였다. 화산이 폭발하며 대기로 분출한 초고열 가스가 성층권을 찢고 올라가자, 거대한 블랙홀처럼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동서남북으로 흡수되며 방향을 잃었고,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호흡기관처럼 ‘들이쉬는’ 소리를 냈다. 순간, 정상부에 서 있던 모든 존재가 공통으로 느꼈다. 숨을 쉴 수 없다는 것. 마치 지구라는 행성 자체가 그들을 집어삼키려는 듯, 공기가 사라졌다.
삼지연 시내에서는 한 아이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붉었지만, 별처럼 반짝이는 검은 점들이 무수히 떠 있었다. 그것은 화산재가 아니라, 불타는 돌덩이가 하늘을 가르며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아이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 불이 비처럼 내려와…”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화산재가 폐로 들어오며, 아이는 말을 잊은 듯 입을 벌린 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어머니는 아이를 흔들었지만, 이미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함성이 사라지고, 경고 방송이 사라지고, 심지어 바람 소리조차 사라지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닌, ‘세계의 종말’이 시작되는 방식이었다.
서울 기상청의 관측장비는 연달아 경고음을 쏟아냈다. 관제 모니터에 표시된 그래프는 더 이상 숫자가 아니라 붉은 선으로 가득했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이건 분화가 아니라… 산이 터져나가고 있습니다.”
곧이어 관측센터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성층권 돌파 확인! 대기 상층부 붕괴 시작! 태양광 차단 예상 시간은… 12분 후입니다!”
위성 영상은 이미 정상부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화면은 처음으로 ‘영상 없음’이라는 문장을 표시했다. 태양 빛이 땅에 닿지 않자, 백두산은 인공의 조명 없이 자체 에너지로만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처럼 보였다.
마을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어떤 이는 도망쳤지만, 어떤 이는 단 한 발짝도 떼지 못한 채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공포라는 감정조차 사치였다. 몸이 움직이기를 멈추는 순간, 사람들은 알았다. 자신들이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국가 이전의 시간, 문명 이전의 공포가 땅 위를 덮고 있었다.
화산은 첫 숨을 내쉬며 세상을 덮었다. 그리고 그 숨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폭발의 충격파가 처음으로 인간의 도시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