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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평양의 문이 열리다

by 홍종원

백두산이 침묵한 지 여덟째 날, 하늘은 여전히 짙은 잿빛으로 덮여 있었다. 태양은 떠 있었지만, 흐릿한 안개와 화산재 속에 감춰져 있었다. 마치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 속에서, 한국군 선두 부대가 평양을 향해 북진을 시작했다.


기계음도, 발포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폐허와 정적뿐이었다. 화산재에 덮인 도로 위로는 찢어진 깃발들과 엎어진 차량들이 무덤처럼 흩어져 있었다. 소총을 든 병사들이 발끝으로 돌과 잿더미를 피해 천천히 전진했다. 군화 자국이 남은 자리마다, 먼지와 피로가 쌓여갔다.


한때 마을이었을 공간. 무너진 담벼락 뒤에서 마른 눈동자가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의 손을 꼭 잡은 아이였다. 그들은 말없이 남쪽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낯선 군복, 낯선 말씨, 그리고 깃발. 그들에게 남한은 ‘해방군’이 아니라, ‘침략자’ 일지도 모르는 존재였다.


휴전선으로 나라가 갈라진 지 90년. 세 번의 세대를 지나,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남쪽 사람들의 등장은 본능적인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대한민국 군입니다. 여러분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장교가 마스크 너머로 조심스럽게 외쳤다. 총기는 아래로 내리고, 군인은 방독 장갑을 벗은 채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아이는 울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단지 노인의 다리 뒤에 몸을 숨기며, 끝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눈빛 속에는 의심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괜찮습니다. 우리는 점령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 말에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너진 창고 뒤에서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모두 굶주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그 순간, 군인들은 깨달았다.
이곳은 점령해야 할 땅이 아니라, 도와야 할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잠시 후 무전이 울렸다.
“선두부대 보고. 회령로 축선 북상 중. 평양 외곽 20km 지점. 민간인 생존자 접촉 중. 교전 및 저항 없음. 북군 병력, 무장 해제 상태로 추정.”


서울 청와대 지하 위기관리센터. 전광판에 초록 불빛이 들어왔다. 윤현우 대통령은 무전 수신 보고를 가만히 들으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본진의 진입은 예상보다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전날 밤의 회의를 떠올렸다.
청와대 국가안보회의실, 커다란 지도가 중앙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었다. 윤 대통령의 목소리가 차분히 울렸다.
“평양은 단순한 도시가 아닙니다. 누가 먼저 그곳에 깃발을 꽂느냐는 단순한 군사 문제가 아니라, 국제사회에 보내는 정치적 신호입니다.”


회의실에 긴 정적이 흘렀다. 국방부 장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 위를 가리켰다.
“본진이 도달하려면 최소 하루 이상 걸립니다. 기동성과 은밀성이 확보된 특수부대를 먼저 투입해 주요 지점을 확보하겠습니다. 인민대학습당, 김일성 광장, 조선중앙방송국이 우선 목표가 될 것입니다.”


윤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단, 이번 작전은 군사적 제압이 아니라 정치적 선점이어야 합니다. 전 세계가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점령군’이 아니라 ‘질서 회복군’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평양 선점 작전은 승인되었고, 작전명은 ‘문 개방(Opening Gate)’으로 명명되었다.


평양 북부 외곽.
백두산 화산재가 태양을 가린 채, 도시 전체를 석회처럼 덮고 있었다. 특수부대가 무언의 진군을 시작했다. 방독 마스크 너머 병사들의 숨소리만이 도심을 채웠고, 장갑차는 재를 밀며 전진했다.


“여기는 알파-원. 평양 북부 진입 완료. 민간인 대피 확인 중. 저항 없음.”


도심은 말 그대로 유령 도시였다. 학교는 문을 닫았고, 시장은 불타 있었다. 병사들이 텅 빈 놀이터를 지나던 순간, 건물 잔해 사이에서 두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병사가 마스크를 벗은 채 조용히 다가가 말했다.


“대한민국 군대다. 괜찮아, 너희를 구하러 왔다.”


아이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붙든 순간, 도시의 의미는 바뀌었다. 여기는 점령지가 아니라, 구호 현장이었다.


“여기는 백두-본부. 평양 인민대학습당 지하에서 생존자 일부 확인. 고위 간부 추정 인물 있음.”


“접촉 승인. 단, 실시간 녹취와 영상 전송 병행하라.”


지하 벙커에 들어선 요원들이 전조등을 켜자, 잿빛 재에 덮인 사람들 무리가 나타났다. 가장 앞에 서 있던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희끗한 머리와 굳은 표정. 그러나 눈빛은 살아 있었다.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오.”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항복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협상하러 왔습니다.”


청와대. 회의실.
서지훈 실장이 급히 들어와 보고서를 내밀었다.


“대통령님, 북한 잔존 고위 간부가 공식 협상을 요청했습니다. 핵 통제권은 전면 이양하고, 군 잔여 병력은 해체 후 한국군 체계 내 통일군으로 편입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북한 체제를 유지하려는 조건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윤현우 대통령님은 한동안 말없이 고개를 떨군 채 깊은 생각에 잠기셨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받아들입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은…?”
“통일정부 수립 협상은 평양이 아닌, 서울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 시각, 평양 북쪽 고속도로 위로 중국군 차량 행렬이 조심스럽게 남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결정된 뒤였다. 한국군은 그보다 앞서 평양에 도달해 단 한 발의 총성도 없이 국기를 세웠다. 중국군이 멈춰 선 지점은 평양에서 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고지였다. 그곳에서 두 군대는 서로를 향해 움직임을 멈춘 채 조용히 버텼다. 지도 위에 그어진 그 선은, ‘누가 공백을 먼저 메웠는가’를 증명하는 역사적 분할선이 되었고, 앞으로의 한반도 질서를 가를 새로운 경계선이 되었다.


16. 평양의 문이 열리다.png


평양 상공에 떠오른 태극기 깃발과 헬기.
그 빛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한반도는, 지금 역사의 다음 문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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