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7. 러시아와의 협상: 연결로 가는 길

by 홍종원
27. 러시아와의 협상.png


모스크바의 밤은 유난히 조용했다.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크렘린 궁은 눈발 속에서 얼어붙은 산성처럼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회의실 안, 러시아 대통령 세르게이 볼코프는 한 장의 극동지역 지도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있었다. 지도에는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파이프라인과 철도선, 그리고 나진에서 시작해 동해를 향해 뻗어 나가는 항로가 붉은 펜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세 명의 참모가 앉아 있었다. 국방장관, 에너지부 장관, 그리고 국가안보국장.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오래된 나무 테이블 위에는, 러시아의 미래를 가늠해야 할 복잡한 셈법이 놓여 있었다.


국방장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한국이 통일에 성공한다면, 미국의 영향력이 압록강까지 올라갑니다. 우리는 이걸 묵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안보국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 한국은 미군 철수를 추진하며, 중립국을 선언하지 않되 중재자 역할을 택하려는 중입니다. 통일된 한반도는 위협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의 관문이 될 수 있습니다.


볼코프는 여전히 지도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는 손끝으로 나진항을 가리켰다.
우리는 북한이라는 완충지대를 잃고 있다. 그러나 그 빈자리는 막힌 벽이 아니라 새로운 통로가 될 수도 있겠지.


그 말에 에너지부 장관이 한 장의 서류를 조심스럽게 앞으로 내밀었다. 비공식 채널을 통해 서울에서 전달된 제안서 요약본이었다. 공식 조약은 아니었지만, 그 문서는 러시아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장관은 짧게 설명을 덧붙였다.
“한국 정부는 러시아에 나진항의 경제적 사용권을 일정 기간 보장하되, 군사적 주둔은 어떠한 형태로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대신, 러시아를 ‘북방 에너지 회랑 프로젝트’의 우선 협력 파트너로 지정하고, 향후 조성될 한·러·일 3국 에너지 통합망의 핵심 축으로 참여를 보장하겠다는 내용입니다.”


문서의 문장은 단호하면서도, 새로운 질서 속에서 러시아의 지속적인 역할을 인정하겠다는 서울의 의지를 분명히 담고 있었다.


국가안보국장이 조용히 덧붙였다.
“또한, 러시아는 향후 구성될 동북아 전략안보협의체에서 핵심 협력국으로 자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사안은 현재 내부 검토 단계에 있으며, 필요시 공식 외교 채널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볼코프는 천천히 투명한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군대는 들이지 말고, 영향력은 확보하라… 그게 가능한 구조인가?


에너지부 장관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 영향력은 군대가 아니라, 연결망에서 만들어질 것입니다. 에너지, 철도, 물류, 기술, 즉 지속 가능한 연결 구조가 곧 러시아의 입지를 대신할 겁니다.”


볼코프는 말없이 테이블 위의 문서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 안에 담긴 미래는, 전선이 아니라 노선이었다.
그는 무언가 납득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엔 전선이 힘이었지. 그러나 이제는 파이프라인이 국경이고, 전기가 국력이며, 항로가 전략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창 너머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발이 천천히 내려와 크렘린의 지붕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펼쳐진 유라시아의 지도가 마음속에서 다시 그려지고 있었다.
좋다. 서울로 전화를 걸게.


잠시 뒤, 서울과의 직통 라인이 연결되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윤현우 대통령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차분했다.
“대통령 각하, 저희 제안을 검토하셨는지요.”


볼코프는 말없이 손에 쥔 펜을 돌리다,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나진항은 그냥 항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곳은 동해로 나아가는 거의 유일한 길입니다. 태평양으로 향한 마지막 창이지요. 단순히 ‘잠시 쓰는 권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좀 더 분명한 미래를 원합니다.”


윤현우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래서 저희는 나진항의 경제권뿐 아니라, ‘북방 에너지‧물류 회랑 프로젝트’의 주축 자리를 함께 드리려는 것입니다. 시베리아의 가스와 전력을 실어 나르고, 철도로 유럽까지 이어지는 통로, 그 중추에 러시아가 함께하길 바랍니다. 단, 군사적 개입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희의 원칙이자, 평화를 위한 전제입니다.


볼코프는 잠시 침묵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회랑의 종착점은 어디입니까?”


“일본입니다.”
윤현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과 동남아, 그리고 호주까지 연결됩니다. 러시아는 에너지와 물류를 공급하고, 한국은 그 흐름을 이어주는 거점이 됩니다. 즉 한국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로 뻗는 에너지와 물류의 허브가 될 것입니다. 중동보다 가깝고, 훨씬 더 안정적인 연결망이지요.”


볼코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는 과거의 적이 아닌, 미래의 파트너를 읽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은 러시아와 아시아 시장 사이에 선, 하나의 통로가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윤현우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벽이 아니라, 다리가 되겠습니다. 협력의 구조 위에 균형을 세우고, 그 위에서 모두가 오갈 수 있는 다리로요.”


잠시 정적. 볼코프는 작게 웃었다.
“좋습니다. 우리는 통일을 막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윤현우는 단호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응답했다.
“그 방식이야말로, 저희가 바라는 협상의 정신입니다.


통화가 종료되자 크렘린 회의장은 잠시 조용해졌다. 국방장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각하, 만약 우리가 철수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미국과 다시 연결될 겁니다. 북한 지역에 미사일 배치가 승인된다면,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 항로 자체가 위협을 받습니다.


볼코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전쟁을 피하고 싶어 하는 자들이 아니라, 100년을 설계하고 싶은 자들이다. 그 설계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협상에 참여해야 한다.”


같은 시각, 서울 청와대 외교안보센터. 윤현우는 러시아와의 통화 직후, 새로운 합의문을 조용히 읽고 있었다.


《한러 에너지 및 경제협력 기본합의서》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러시아는 나진항의 경제 사용권을 일정 기간 보장받으며, 북방 에너지 회랑 구축과 동북아 전력망 연계 프로젝트에 우선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군사 주둔은 금지되며, 대신 러시아는 향후 구성될 동북아 전략안보협의체에서 핵심 협력국으로 포함될 수 있다. 양국은 유라시아 통합망 형성을 위한 외교 협력을 공동으로 추진해 나가기로 한다.


서지훈 안보실장이 물었다.
“그런데 러시아를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윤현우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뢰란 감정이 아니라, 이해로 쌓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러시아는 그 이해의 선을 넘고 있습니다.”


그는 펜을 들어 서명했다. 종이 위의 잉크가 번지듯, 동북아의 새로운 질서 또한 조용히 번져가고 있었다.


keyword
이전 06화26. 중국과의 협상: 국경을 넘지 않는 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