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책과 세상의 나이
어릴 때부터 잠에 드는 게 쉽지 않았다. 잠자리에 누우면 끝없는 생각의 가지가 펼쳐지는데 가지를 없애는 속도보다 가지가 뻗어나가는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이다.
공상끼가 다분한 AB형이라는 혈액형식 분석 결과도 나에겐 꽤나 들어맞는 이런 불면의 이유였지만, 그보다는 대학생이 되어 검사한 mbti의 INTJ유형(Introversion-iNtuition-Thinking-judging)이라는 게 보다 적절한 불면의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외국에서는 보다 널리 알려진 '정신적 과잉 활동인'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이 이유 있는 불면에 토를 달지 않고 살기로 결정했다.
생각이 많아 잠이 들지 못할 때 내가 나만의 처방법으로 개발한 것이 '상상'이다. 10대 때부터 이런 상상을 잠자리에서 펼쳐왔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써 내려가는 세상에서 등장한 건 그 당시 유행하던 TV 만화였다. 마법소녀 리나나 그랑죠 같은 류의 일본 만화의 판타지는 이런저런 공상을 하기에 적절한 무대와 절적 한 인물들을 제공해주었다. 그러다 90년대 말 유행하기 시작한 판타지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 같은 영하는 상상의 영역을 보다 넓혀주었다.
10대 때의 상상은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미디어 표절과 사춘기의 허세가 들어있었다.
대학과 함께 시작한 20대가 되었다고 해서 운명과도 같은 불면이 갑자기 사라질 리 없었다. 그래도 10대 때와 상상의 질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보다 '현실적'이 되었다는 거다. 머릿속 만화 같은 이미지가 보다 현실적인 실사 배경으로 바뀌었다. 2D에서 3로의 공감각적 발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래픽 기술이 진일보한 것이 이런 '보다 현실적인 상상'에 도움이 되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상상 속 주인공은 여전히 나였지만 일상의 몇 사람들이 상상 속 무대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아! 출연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리 편' 위주로 등장시켰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밉상'들에게도 자리를 허가했다. 10대의 그것보다 현실적이고 입체적이고 로맨틱한 세상이 상상 속에서 구축되었다.
보다 현실적
얼마 전 진입한 30대에도 상상 속 세상은 여전히 발전하고 있다. 돈을 벌기 시작하고 로또를 종종 구매하기 시작할 때부터 잠자리의 상상은 극적인 전환을 맞았다. 이異세계에 대한 동경이나 판타지는 로또가 주는 보다 현실적인 구매력 증대의 환상을 이기지 못했다.
내 소망 중 하나는 수도권 근교 공기 좋은 어딘가에 집을 짓고 전원생활을 즐기는 것이다. 예산을 잡고 집 구조는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브랜드의 가구와 가전을 들여놓을지, 화장실이나 부엌, 거실은 어떻게 꾸밀지를 상상해본다. 이전보다 구체적으로, 보다 입체적으로, 보다 현실적으로 말이다.
나만 현실인이 된 건 아니다.
서점에는 자주 들르는 편이다.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거기서 거기인 자기계발 서적, 처세서, 심지어 어학책과 대기업 인적성검사 수험서가 베스트셀러 수위에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종교파트에서까지 '돈 얘기'를 하는 책이 잘 팔리니 말을 잃는다.
철학이나 시집, 생각할 만한 책들은 인기가 없다. 소설이나 인문학 책이 베스트셀러가 돼도 우리나라 작가를 기대하기 어렵다. 꿈을 꾸지 않고, 낭만을 잃은 대학생들이 책에 기댈 여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생각이 담겨야 할 서점의 매대에 기능을 담은 책들이 주류를 이루는 데에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을 것이다.
공부하는 법, 위로받는 법, 칭찬받는 법, 상식으로 대화하는 법까지 책으로 나와있는 현실은 비참하다. 현실의 가능성을 열 수 있게 해 준 것은 늘 누군가의 이상과 희망과 더 깊어지는 삶을 위한 고민이었는데 그걸 위한 상상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있다.
시간도 여유도 없으니 현실만 쫓게 된다.
때로는 느긋한 자세로 하늘을 보고 차의 향을 맡으며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해보기도 해야 할 텐데.
왜 이렇게 어려워진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