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일기장
언제부터 '일기장'이라는 말 대신 '다이어리-Diary'라는 외래어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의 마무리든, 하루의 계획이든 기록하는 것을 일기장이라고 쓰는 게 틀리지 않을 텐데,
다이어리가 되어버렸다.
다이어리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계획적인 생활을 일찍부터 실천한 것은 아니고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학생 선도 차원에서 전교생에게 지급했던 것이다.
고2, 고3 때 그렇게 쓰고 나서 대학교에 들어갔더니 어떤 낭비적인 지급품 대신 다이어리를 1인 1개씩 주었다.
2학년이 되어서도 다이어리를 받았는데 프랭클린의 보급형이었다. 지나치게 자세하게 짜인 일정을 감당할 수 없었다.
프랭클린 다이어리는 종속되는 불쾌감을 약간 느끼게 했다. 펼칠 때마다 뭔가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다이어리는 아무리 비싸도 쓰기 힘들다. 그리고 매해 습관적으로 하는 다이어리에 대한 고민은 그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내 취향에 맞는 것이 아니면 글이 쓰이지 않는 이유로 선물이나 조직 차원의 것도 쓰지 않았다.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몰스킨, 그리고 올해는 미도리 다이어리를 구했다. 미도리도 세 번째 권이다.
올해는 별다방의 이벤트 몰스킨을 썼는데, 내가 전에 직접 사서 쓰던 몰스킨 특유의 종이 냄새가 없어 실망스러웠다.
그 종이 냄새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으나 별다방의 몰스킨은 뭔가 보급형의 느낌이 물씬 난다.
대형 카페의 이벤트로 너나 할 것 없이 들고 다닌 덕에 희소성이 사라져서 정이 멀어진 것도 사실이다.
몇몇만 아는 향이 나고 필기감이 독특한 그 정체성을 다시 찾는다면 몰스킨을 다시 쓰고 싶어 질 텐데...
미도리는 달력이 일본 기준이라 것만 빼면 좋다.
무엇보다 종이 질감이 좋다. 잉크도 잘 먹는지라 쓰는 맛이 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그 디자인 그대로라는 것도 마음에 든다. 몇 년 후에 이 다이어리들을 다시 꺼내봐도 질리지 않을 거다.
괜히 궁금해져서 2015년 다이어리의 첫 페이지를 펼쳐봤다.
그리고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나는 그걸 또 왜 한다고 해서 이 고민을 하는 걸까'
'분쟁의 시작은 처음 말을 거는 사람이 아니라 대응하는 사람에 따라 결정된다'
그 일이 뭔지도
그 아래 문장이 어디에 나왔었는지도 1년 전쯤의 일이지만 기억이 난다.
그게 벌써 1년 전이었다.
다이어리를 '개시'하게 되면 다음 1년에는 뭔가 대단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설렘이 느껴진다.
2015년 1월 1일에도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원래 그런 건데 괜히 실망스럽다.
요즘 다이어리들이 다들 그렇듯 미도리 다이어리도 2016년 다이어리의 시작이 2015년 12월이다.
그리고 여덟 칸으로 나뉜 위클리에는 날짜를 직접 기입해야 한다.
매해 일요일을 한 주의 시작으로 정했는데, 이번에는 월요일을 한 주의 시작으로 정하고 1년 치 날짜를 모두 적었다.
2016년에는 그걸 또 하지 않기로 했다. 분쟁의 시작에 대해서도 내 탓을 하지 않기로 했다.
2016년... 결국 오는구나
2016년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종종 해왔다
사실 그런 생각 2003년부터 쉬지 않고 누군가 부러워하는 일이 생길 때에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나 오래 묵은 생각인데도 아직까지 참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일런지도 모른다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