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얼굴 후기
진지하게 골몰하는 일이 생겼다.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또 글쓰기다.
읽고 쓰고 말하고 되뇌이고 곱씹고 찬탄하는 일은 사실 일생 내내 계속 되어온 짝사랑에 가깝다. 너무 진지해지면 상처받을까봐서 한동안 노력하지 않는 체까지 해야 했던 나만의 숙제이자 빛나는 파랑새. 요즘은 글쓰기에 진지함을 깨닫고, 몰두하고, 평가받고 상처받을 일이 거듭될수록 부끄러움이 많아진다.
물론 이정도면 제법 얼굴은 서지 않나 싶었던 내 글쓰기 실력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렇게 잘 쓰는 사람이 많구나, 이토록 치밀한 고민을 하며 쓰는 사람들이 있구나 반성하며 나의 글을 돌아보는 과정도 물론 쑥스럽고 민망하지만, 그보다 더 부끄러운건 내가 그동안 가볍게 웃어넘겼던 모든 창작물들과 완성품들이다. 어설픈 맛으로 보던 생활툰 작가가 어린이 책의 삽화를 도맡아 그린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기성 출판물답게 견고하고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한 날. 작가의 성장을 목도하는 것이 즐겁고 기쁜 동시에 ‘그렇게 어설픈 것들이 이렇게 발전하기도 하는구나’싶어서 멈칫했던 순간이 있었다. 실은 그림체며 내용이 귀엽기는 한데 그 이상이 없어서 선뜻 프로가 되진 못할거라 속단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꾸준하더니, 정진하더니, 애쓰며 나아가더니 어느덧 어엿해져 있는 것을 보고 사실은 질투와 부끄러움을 느꼈다.
열을 쏟는 일이 반복 될 수록 비슷한 일은 자주 생겼다. 바밍타이거와 이찬혁이 지난 앨범을 냈을 때만 해도 나는 하하 웃으며 뮤직비디오와 무대 영상들을 봤다. 하여간에 재밌는 사람들이라며 그 독특함과 엉뚱함에 웃었고 사실은 좀 우스꽝스럽다 여겼다. 그런데 한두번 핀잔을 듣고나서 멈출 줄 알았던 뮤지션들의 기행은 멈추지 않았다.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내내 진지하고 엉뚱하고 독특했다. 나는 그제서야 턱을 괴고 그들의 노래를 들었다. 무대를 보고, 영상을 틀어 놓는게 아니라 음악이 들렸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애쓰게 하는지, 한결같이 진지하고 이상하게 만드는지,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이 도대체 무엇이었을지를 고민해보고 싶어졌다. 그즈음부터는 나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음악을 그렇게 ‘들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또 부끄러웠다. 그때, 그렇게 가볍고 별스럽다 여기며 깔깔 웃어대지 말걸.
오늘도 그랬다. 연상호 감독의 ‘얼굴’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영화를 좋아해 종종 만나 영화를 보고 감상을 나누는 언니와 함께하는 길이었다. 영화는 한마디로 기특했는데, 주제나 연기나 예산이나 연출이나 모든 게 총체적으로 그랬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영화는 시각장애를 가졌음에도 전각의 장인(도장파기의 장인)이 된 아버지(권해효)에게서 시작한다. 어느덧 70대에 가까워진 장인은 이제는 살아있는 기적이라 불린다. 생애를 기리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와중, 아들(박정민)에게 어머니의 백골 시신이 발견되었단 소식이 전해진다. 눈먼 아버지와 갓난쟁이 자신을 두고 도망친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말에 놀랄새도 없이 아들과 아버지는 고인의 초상화나 사진도 한 장 없이 빈 종이만 올려두고 장례를 치른다. (여기서부터 영화 내용 스포!!!)
영화는 일견 예상했던 대로 흘러간다. 있는 줄도 몰랐던 이모들이 장례식에 찾아와 유산 욕심은 버렸으면 졸겠고 네 엄마가 그렇게 못생겼다며 악담을 퍼붓는다. 게다가 어머니가 사실 외할아버지의 불륜 사실을 폭로하는 바람에 외할머니에게 매를 맞고 집안 패물을 훔쳐 도망 나온지라 연락도 끊겨 알길이 없었다는 이야기까지 해댄다. 아들은 고인을 두고 이어가는 망발에 부아가 치밀고, 다큐멘터리 감독은 흥미로운 이야기에 구미가 당긴다. 결국 둘은 억지로 꿰어맞춘 신발처럼 불편하게 붙어 다니며 어머니의 과거를 파헤치는데, 이는 70년대 방직 공장에서 있었던 노동자를 향한 일상적인 멸시, 장애인을 향한 조롱과 여성을 도구화하는 시선, 묵인과 폭력을 통해 재생산되는 남성성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사실 범인도, 범행의 계기도, 그 마음과 결말도 다 알만한 내용들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점 단 하나는 이들이 진정 성실하고 진지하게 이 영화에 임했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가, 이것은 얼만큼이나 잔인하고 왜곡되었는가를 아주 천천히 뜯어내 보여주는 방식을 보고 있자면 돌연 기특해진다.
시작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삶을 되짚어보자. 어머니의 장례식에 찾아온 친인척은 두 언니뿐이다. 기어코 아들을 바랐을 시대에 세 번째 순서마저 딸로 태어난 것도 죄인데, 곱지 못한 얼굴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얼마나 더 멸시를 받았을 텐가. 언니들의 태도와, 추억이랍시고 주워섬기는 말들에서는 어머니가 미운 낯에 곧은 말만 했다는 이유로 별나고 못된 취급을 받았으리란 사실이 뻔하게 드러난다.
사실 미추를 결정하는 것은 진정 그 생김이 아니라 주변의 평가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곱다고 말할 때 그것은 더 없이 귀해지고, 역으로 손을 모아 추하다 할 때는 한없이 못나지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집안에서부터 창피하고 못난 존재로 길러져 멀리로 도망나선 이후에도 집안에서부터 달고 온 꼬리표를 끌고 다닌다.
이어진 공장에서의 삶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굼뜨고 순하고, 조금 못난 이를 두고 거리낌 없이 ‘똥걸레’라는 별명을 붙여 놀려댄다. 이유는 단 한가지, 그래도 되어서다. 한 번쯤 말붙여 보고 싶을 만큼 미인도 아니고, 있는 집 자식도 아니며, 늘상 자신감이 없어 말끝이 여물지 못한 어린 여자, 그마저도 가진 기술이 없어 아무나 대체할 수 있는 시다바리. 기름지고 뚱뚱한 얼굴에 부한 낯을 하고도 인품 좋단 소리를 듣던 사장과는 달리 어머니는 여리고 선이 고운 몸, 누구보다 여리고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도 괴물이라 불린다.
스크린에서 보여지는 어머니의 역할은 단 한가지다. ‘얼굴’. 어떤 낯을 가졌는지만이 어머니를 향한 단 한 가지의 설명이다. 왜냐면 그 얼굴의 아름다움과 추함만이 사람들이 원하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아름다움을 원한다. 잘 파여진 도장 속 글씨를, 매끈하게 쵤영된 다큐멘터리를, 보기 좋은 이야기와 좋을 대로의 추억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이 모든 아름다움은 순수하고 감탄하며 향유하기 위함이 아니라 소유하며 뽐내기 위함이고, 가졌음에 우월함을 느끼고 추함을 욕보이며 즐겁기 위함이다.
아버지가 주변 상인들의 조롱에 속아 어머니의 얼굴이 아름다운줄 알고 청혼을 했던 날, 그가 원했던 것은 병신이라 조롱받는 자신의 얼굴을 세워줄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러나 ‘저리 예쁜 처녀의 구애를 받으니 좋겠다’던 주변 상인의 부추김이 눈앞이 보이지 않는 자신을 향한 조롱이었음을 깨달은 날부터 어머니의 얼굴은 자신을 쫓아다니는 또 다른 멸시의 증거가 된다. 고왔던 낯이 추해지는 순간 낯을 들 수 없는 쪽은 멸시하는 주변인들이 아니라 저 자신이다. 손가락질 해대는 몸뚱이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지를 수 없으니 미워지는 쪽은 손가락이 향하는 곳, 제가 가진 추한 얼굴이다. 곱다 말하고 귀하게 여겨주었으면 그렇게 될 수도 있었던 얼굴은 묵인과 폭력 아래에서 그 낯을 바꾸지 못한다. 마지막까지 주인공이 애타게 바라던 얼굴, 어머니의 사진이 공개되는 장면이 좋았던 이유는 사실 사진 속 여인의 얼굴이 특별히 흉하고 괴이하지 않아서이고, 결국 대부분의 추함이 그토록 가여운 것임을, 추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 모두 잔인하고 부질 없음을 느끼게 해서다.
비록 새로울 정도로 대단하지는 않아도 영화는 성실하게 제 할말을 다한다. 이리저리 비틀고 극적인 순간을 주려고 노력하기보다 쉽고 곧은 길을 걷는다. 그 성실함을 다 읽어내리고 나면 과연 이 이야기가 함부로 못나다고 말할 수는 없어 진다. 아쉽지 않느냐면 아쉬운 부분이 있다.(조연 배우의 연기력, 실상 여성에 관한 이야기임에도 남성화자의 시선에서만 그려지는 점, 영화 소품으로 사용되는 전단지의 글씨체와 사진의 디테일 등.) 하지만 적은 예산과 한정된 시간안에 이토록 하고 싶은 말을 충실히 해냈다는 점이, 누군가를 만족시키고 쾌감을 선사하거나 손익 분기점을 넘기기 위해 아등바등대는게 아니라 정말 하고 싶어서 만든 영화라는 게 느껴진다는 점이 기특하다는 말 밖엔 딱히 표현해 낼 길이 없다.
그래서 나는 언니와 함께 고개를 주억대며, 아마 연상호 감독과 주연배우들의 차기작도 감상하지 않을까 하는 미래를 점쳤다. 언니는 마침 이직에 성공한 친구에게 자극을 받아 자신도 오래동안 미루었던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한 차였고, 나는 글쓰기 수업에 등록해 열심히 글을 이어나갈 생각이라는 대화를 했던 바였다. 우리는 진지하고 열성적인 일들이 사실은 어설프고 좀 부족한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얼마나 제 자신에게, 보는 사람에게 가닿을 수 있는지를 말했다. 수작이냐고 물으면 ‘또 그렇게까지는’ 싶은데. 그러나 사실은 이런 시도가 계속되어야 업계가 유지되는 게 아닐까, 그래야 계속하는 사람들이 있고 계속되는 일들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으려면 응당 이만큼은 진지해야지 싶어서 자꾸 창피해지려 했다. 이제 진짜 그만 부끄러워야지 싶어서 당장 노트북을 켜고 감상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