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 중

by 정유지





오늘의 창은 '이직 중'입니다.


인용된 디카시 <이직 중>에서 소재로 사용된 '선박(배)'은 단순한 오브젝트가 아닙니다. 그 존재 자체가 여러 층의 효용(value)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선박이 <이직 중>이란 의미 속에는 무언가를 옮기고 있는, 혹은 장소 안과 밖에 놓여 있는 모호한 상태에 있습니다. '노는 물' vs '여긴 얼씬도 하지마'라는 시적 문장은 그 경계, 그 제한, 그 이동성 혹은 불허(금지)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여기서 선박은 기능의 유보 상태입니다. 지금은 물 위에 있지 않거나, 원래 있어야 할 장소에서 떨어져 있거나, 배가 움직이지 않는 상태라면 그 효용이 잠시 중단된 상태입니다. 선박은 여전히 이동할 수 있고, 운송할 수 있고, 다른 물을 만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이라는 조건이 달라지면, 다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긴 얼씬도 하지마'라는 시적 문장에서 보듯, 어떤 공간에서는 선박이 허용되지 않거나 접촉이 금지된 공간이 있습니다. 배가 있어야 할 바다나 물의 조건과 맞지 않아서 배의 효용이 제한당하는 공간이 존재합니다.


선박은 단순히 물리적 운송수단이 아니라, 가능성과 정체성, 기능과 존재의 간극을 드러내는 은유가 됩니다.


선박은 원래 바다나 강, 항구를 통해 사람과 물자를 이동시키는 역할. 생업, 무역, 생계, 문화적 교류를 가능하게 합니다. 바다의 풍랑, 조류, 기상 변화 등에 맞서 일정한 구조를 유지하며 사람과 화물을 지키는 그릇이기도 합니다. 어민의 삶, 해양 문화, 공동체의 전통과 정체성의 일부다. 지역 경제와 생계와 연결돼 있습니다.


선박은 뭍과 바다, 한 장소와 다른 장소 사이를 잇는 매개. 새로운 가능성, 이주, 어업의 변화, 계절 노동의 이동 같은 것들이 배를 통해 이뤄집니다. 어획활동, 해상 환경, 해상교통 등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접점입니다. 바다와 기상 조건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동시에 인간의 활동이 바다와 연관됩니다.




“나는 바다와 약속된 존재야. 염기(鹽氣)와 파도가 나의 살갗을 쓰다듬을 때 나는 제 역할을 찾아. 뭍에 올라온 지금 이 순간, 나의 용도는 가려지고, 나의 목소리는 조용해져. 하지만 노는 물은 다르지? 다른 파도, 다른 조류, 다른 바람, 그 물길로 다시 떠나면 나는 내 이름이 되살아나. 운송하는, 연결하는, 삶을 지탱하는 그 무엇으로.”


"나의 존재는 나의 기능이 중단되었을 때도 의미가 있는가? ‘노는 물’과 ‘작동하는 물’ 사이에서 나는 어디에 놓여 있는가? 내가 속한 장소, 내가 작동할 수 있는 영역은 어디인가? 기능이 멈춘 순간에도 나의 아이덴티티(정체성), 나의 이야기는 살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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