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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성 Nov 09. 2024

1959년 루산, 마오쩌뚱의 음모

중국현대사(41)-1959년 루산회의(3)

펑더화이

펑더화이는 루산회의 직전해인 1958년 8월 베이다이허 회의 참석 후, 약 3개월 반 기간 동안 헤이롱장(黑龍江), 지린(吉林), 랴오닝(遼寧), 네이멍구(內蒙古), 칭하이(青海), 간쑤(甘肅), 섬서(陕西),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장시(江西), 안후이(安徽) 등 중국 전국의 10여 개 성 지구를 돌아보았다. 이 기간 중 인민공사화 운동, 인민생활, 전민 강철 제련 등의 현장을 둘러보면서 대약진운동의 실상과 문제점을 확인했다. 이 기간 중 자신의 고향인 후난성 농촌지구에 갔을 때 한국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불구가 된 홍군 출신 농민이 그에게 말했다.


“젊은이들은 "전민 강철 제련"운동에 동원되어 갔고 마을에는 아이들과 여자들만 남아 있습니다. 곡식은 땅에 흩뿌려져 있고 고구마 잎은 말라가고 있는데 수확하고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또한, 펑은 1959년 루산회의 개최 직전인 4월 24일부터 6월 13일까지 약 50일간 중국 군사 대표단을 인솔하고 소련과 동유럽 각국을 우호 방문했다. 베이징으로 귀국한 다음 날(1959.6.14) 국방부에 출근하여 오랜 기간 자신의 부하이자 전우였던 당시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황커청(黃克誠)으로부터 그간의 국내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국내 경제 상황이 매우 안 좋다는 것을 다시 확인해야 했다. 국내 많은 지방의 상황이 매우 심각한데, 특히 간쑤(甘肅) 등 일부 지방에서는 이미 양식이 없어서 기근을 피해 외지로 나가 구걸하며 유랑하는 군중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펑더화이는 보고를 들은 후에 손을 등 뒤로 맞잡고 고뇌에 찬 표정으로 사무실 안을 거닐며 맴돌았다.


황커청

황커청(黄克诚)

7월 17일 아침에 황커청(黃克誠)이 루산에 올라왔다. 본래 그는 이 회의에 참가하지 않고 베이징에 남아서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서 군사위원회의 일상 업무를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바로 전날 급히 전달된 마오쩌뚱의 소집 명령을 받고 온 것이었다. 바로 그 전날(7.16) 저녁에 군사위원회 판공청 주임 샤오샹롱(肖向榮)이 황커청에게 루산에서 온 당 중앙의 통지를 전달하면서 말했다.


“마오 주석께서 총장께서도 루산회의에 참석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회의는 이미 끝나지 않았나? 그리고 내가 가면 여기서 군사위원회 일상 업무는 누가 챙기나? 무슨 일이기에 내가 꼭 가야 하나?” 혼잣말처럼 묻는 황커청의 말에 샤오샹롱이 대답할 말은 없었다.


당시 후난성 위원회 서기 저우샤오저우(周小舟)와 저우후이(周惠), 마오쩌뚱의 겸직 비서 리루이(李锐) 등은 황커청이 루산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황커청과 후난성에서 같이 근무한 적이 있거나 마오쩌뚱 곁에서 비서 업무를 담당한 경험이 있던 이들 모두는 ‘만일 황커청이 있었더라면 펑더화이가 문제의 편지를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아쉬워하던 중이었다. 즉, 펑더화이는 대부분의 일을 보통 황커청과 의논하는데, 만일 그랬다면 황커청이 편지 쓰는 것을 말렸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래는 황커청의 회고록에 기록된, 1959년 여름, 그가 루산에 도착한 후에 펑더화이와 나눈 대화 내용의 일부분이다.


"루산에 오른 후 방에 들어서자마자 펑형(彭兄)이 자신이 써서 마오 주석에게 전달했다는 편지를 내게 건네주었다. 내가 자세히 보고 나서 그에게 말했다. “이 편지에서 제기한 의견에는 나도 공감한다. 단, 문장 표현상 문제 제기하는 방식에 자극적인 부분이 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강하게 표현했나?” 펑형이 대답하기를 “실제 상황이 그 정도로 심각하다. 그러나 회의장에서는 감히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하고자 그렇게 표현했다.”


“펑형은 늘 감정적으로 일 처리를 하는 것 같다. 펑형과 마오 주석은 오랜 세월 동안 같이 일해서 서로 간에 이해 못 할 일도 없을 텐데 이런 내용을 직접 만나서 말로 하지 않고 무엇 때문에 편지를 써서 전달했나?”


대화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점은 펑더화이와 황커청 사이의 친밀한 정감이다. 두 사람 모두 후난성 출신 동향으로 수십 년간 수많은 전쟁터에서 동고동락하고 생사고비를 같이 넘기며 정을 쌓아온 사이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측면에서 말하자면 펑더화이와 마오쩌뚱의 관계가 황커청과의 관계보다 못하다 할 수 없다. 단, 당시에 마오는 이미 최고 권력자, 독재자가 되어 있었다.



마오의 기습 공격

황커청에 이어서 린뱌오(林彪), 펑전(彭真) 등도 뒤늦게 루산에 도착했다. 마오가 이들을 루산으로 호출한 이유는 이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들을 자기편에 세워두기 위해서였다.

회의장에 입장하는 마오쩌뚱

7월 16일, 마오는 펑의 편지 위에 "펑더화이 동지의 의견서"라는 제목과 “각 동지에게 참고용으로 인쇄·배부할 것”이라 쓰고 다음 날(7.17)부터 그 문건에 대해 토론하라고 지시했다. 23일에는 마오쩌동이 긴 담화를 발표하고 펑더화이 외에도 그와 관점이 같은 의견을 밝힌 황커청, 장원톈(张闻天), 저우샤오저우 등을 “우파로부터 30km 거리에 있는 동요분자”라고 지칭하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때부터 회의의 중심과 방향이 ‘좌의 교정’에서 ‘반우파 투쟁’으로 바뀌었다. 이어서 8월 2일에서 16일까지 루산에서 중공 8기8중전회가 속개되었고, ‘우경 기회주의’에 대한 비판 투쟁을 더욱 강도 높게 진행하고 ‘펑더화이를 우두머리로 하는 반당집단의 착오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마오가 펑더화이의 편지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한 배경과 이유에 대해 가오강(高岗)과 천윈(陈云)의 정치비서와 마오쩌뚱의 겸직 비서를 지냈던 리루이(李锐)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마오는 펑더화이가 (당과 국가의 최고 영도자인) 자신의 권위를 존중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징강산 시기부터 혁명전쟁과 항일전쟁을 같이해 왔고 마오가 펑보다 5살 위지만 서로 ‘라오마오(老毛)’, ‘라오펑(老彭)’이라 부르며 동지로서 친구처럼 지내왔다. 그런데 마오의 권력이 견고해지고 당내 위상이 높아지면서 마오에게 복종하는 태도로 바뀐 다른 동지들과는 달리 펑은 여전히 마오에게 직언과 비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두 사람의 강한 개성이 충돌한 것이다.


둘째, 한국전쟁에서 공을 쌓고 개선장군으로 귀국한 이후, 국방부 부장으로서 군대를 직접 지휘하면서 군부 내에서의 실권과 장악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는 펑더화이를 견제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셋째, 한국전쟁에 참전한 마오쩌동의 아들 마오안잉이 조선(북한)의 창성군 대유동 동굴에서 미군 폭격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죽은 사건에 대한 마오의 마음속 상처와 회한이다. 마오가 그해 7월 23일에 한 연설에서 이와 관련한 자신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드러낸 바 있다.

“나쁜 선례를 만든 사람은 대가 끊긴다는데 내 아들 한 명은 폭탄에 맞아 죽었고, 또 다른 아들 하나는 미쳤다. 나는 대를 이을 후손이 없다.”

겉으로 표시한 적은 없었지만, 펑더화이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넷째, 펑더화이가 마오에 대한 개인숭배 풍조에 공공연하고 빈번하게 반대하는 의견을 밝히고 다녔다. 1956년 소련공산당 20차 당 대표대회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 반대 의견을 발표한 이후 마오의 관심과 걱정은 ‘중국의 흐루쇼프는 누가 될 것인가?’에 집중되었다. 그 당시에 마오가 의심하고 경계한 인물은 7~8년 후에 자신이 조종, 발동한 대동란 시기에 “중국의 흐루쇼프”라고 지명하고 숙청한 류사오치(刘少奇)가 아니었다. 마오가 경계한 인물은 바로 당과 군부 내에서 거리낌 없이 개인숭배 풍조에 반대하고 흐루쇼프를 지지한다고 공공연하게 밝히고 다니는 펑더화이였다. 펑더화이는 중난하이 서루(西樓)에서 개최된 중공중앙정치국 회의에서 마오쩌동 찬양 노래인 ‘동방홍(東方紅) 부르기와 “마오 주석 만세” 제창 행위에 반대하는 의견을 두 차례나 제기한 바 있었다. 또한, 1959년 루산회의에서도 “허위 과장 보고 풍조, 소형 용광로 등은 모두 표면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폐단의 근원은 민주주의의 결핍과 개인숭배다”라는 말도 했다.


이 같은 분석과 추론들이 모두 일리가 있으나, 결정적인 이유는 마오의 불안감과 의심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이 주도한 대약진운동의 정책 실패로 인하여 자신에 대한 당내 지지기반이 약해지고 있음을 감지하고 불안감이 커지면서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펑더화이에 대한 견제 심리가 더욱 강하게 발동했다고 볼 수 있다.


1959년 루산에서 마오가 펑더화이 숙청을 기습공격 하듯이 그렇게 급속하게 진행한 이유가 뭘까? 그것이 단순히 펑더화이가 전달한 편지 내용에 대한 불만이나 분노 같은 즉흥적 감정 때문만이었을까? 그렇게 본다면 그건 인간 마오쩌뚱을 너무 순수하게 보는 것일 것이다. 필자는, 마오가 스스로 ‘문화대혁명’이라 작명한 대동란 발동을 기획하면서 그 기초 준비 작업으로 우선 군부(인민해방군)의 실권을 펑더화이로부터 린뱌오에게 넘겨주려고 그렇게 한 것이라고 본다.


중국현대사 #현대중국의이해 #펑더화이 #황커청


https://youtu.be/x6j1vrtuig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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