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아마도 청량한 에메랄드빛 바다일 것이다. 그러나 제주를 조금씩 알아갈수록 제주의 진가는 숲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곶자왈에 가면 암석들과 나무들이 기묘하게 공존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치 태초의 자연을 품은 듯 신비롭다. 나무들은 돌 위에 위태롭게 뿌리를 내린 채 비틀리고 뒤틀려 있다. 그 형상이 습하고 고요한 공기와 어우러져 기괴하며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지금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곶자왈이지만, 사실 태초에는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조차 자랄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곳은 수만 년 전, 화산이 폭발하며 용암이 흐르고 굳어서 생긴 현무암 지대로, 온통 돌 천지일 뿐 나무가 자랄 토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곳에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작은 사건들이 더해져 지금의 숲이 만들어졌다.
그 시작은 돌과 바람의 만남이었다. 현무암의 구멍 사이로 바람이 드나들고, 그 과정에서 기온차가 더해져 이슬이 맺힌다. 이슬로 인해 습기가 생기면 돌에 이끼가 낀다. 이끼가 자라다 죽으면 그 잔해가 흙이 되어 얇은 토양이 생긴다. 그러면 그 토양에서 한해살이 풀이, 이어서 작은 식물들이 살다가 죽는다. 토양층은 점점 두꺼워지고 마침내 나무가 자란다.
그 과정이 과학적으로는 단순한 법칙에 의한 결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숲에 들어가 고요한 정적에 휩싸인 채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를 느끼고 있으면, 수만 년 동안 그곳에서 ‘하필’ 일어났을 수많은 사건을 상상하게 된다. ‘하필 현무암에는 구멍이, 제주에는 바람이 많았고, 우연히 그 둘이 만나 이슬이 생겼고, 공기 중에 떠돌던 이끼의 포자가 하필 그곳에 자리를 잡았고......’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 위에 겹치고 쌓였을 우연을 그리다 마침내 눈앞의 거대한 숲에 다다르면, 그곳의 모든 것이 새삼 경이롭고 귀하게 느껴진다. 흙 한 줌, 나무 한 그루, 작은 곤충 한 마리까지.
작은 우연이 모여 숲을 만들었듯, 삶에서는 우연이 모여 현재를 만든다. 내가 카페에서 일을 하게 된 데에도 많은 우연이 얽혀 있다. 애당초 나는 올해 7월부터 제주살이를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지인의 조언을 듣고 3월로 앞당겨 제주도에 내려오게 되었다. 4월, 우연히 한 카페에 들렀다. 그곳의 공간과 분위기, 커피가 마음에 들어 ‘이런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한 달이 넘게 수시로 아르바이트 구인 사이트에 들어가 공고를 확인했다. 포기해야 하나 고민할 무렵, 기다리던 공고가 올라왔다. 나는 그 즉시 아르바이트를 지원했고, 마침내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만일 한 달의 기다림을 포기했다면, 그때 그 카페를 방문하지 않았다면, 예정대로 7월에 제주도에 내려왔다면, 나는 지금 그곳에서 일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 점점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 과거에는 예상치 못했던 신기한 우연도 있고, 인연도 있다. 불행했던 경험도 있고, 뼈아픈 내 선택과 행동도 있다.
그렇게 끝없이 과거를 되짚다 보면, 어떤 과거는 가슴에 사무치는 후회를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 여기, 이 모습으로 존재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면 그 일들이 기적적인 우연으로 느껴진다. 그중 사소한 무엇 하나라도 빠졌다면 좋아하는 카페에서 일하는 경험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곳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제주의 자연에서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못했을 것이며, 이렇게 글을 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수만 년 동안 쌓인 수많은 일들의 가치를 알지 못하면 곶자왈은 그저 숲일 뿐이다. 깎아버리고 베어버리면 그만일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 가치를 알면 그곳은 기적이 된다. 그곳이 기적이 되면, 과거의 어느 사건 하나 하찮거나 불필요한 것이 없다. 돌도, 바람도, 이슬도, 이끼도, 그리고 다른 무엇도.
우리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 수많은 우연과 선택이 모여 삶을 이룬다. 그 역사의 가치를 안다면 나의 현재는 기적이 된다. 나의 현재가 기적이라면 과거의 어느 순간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과거의 아쉬운 선택들도 용서가 되고, 불행마저 그저 수많은 우연 중 하나로 품을 수 있다. 나의 현재를 소중히 여기고, 매 순간 나로서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매일을 경이로운 숲으로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