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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렸고 겨울은 오지 않았다

by 은도

한라산에 눈이 내렸다.

그러나 아직 겨울은 오지 않았다.



겨울은 내게 늘 모순적인 계절이다.

겨울을 좋아하는 나는,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겨울을 기다린다.

그러나 막상 초겨울 찬기가 스치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며 밀어낸다.

가을이 채 물러가기 전부터 두꺼운 패딩을 꺼내놓고 만지작거리면서도

카디건 하나 달랑 걸치고 나가 추위에 벌벌 떤다.

겨울이 왔다는 것은 한 해가 저물어 간다는 것,

후회와 미련을 과거에 묻어두고 떠나가야 한다는 것,

조금 더 젊은 날의 나와 작별해야 한다는 것.

그 모든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엔, 세월은 너무 덧없고 나는 아직 욕심이 많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3월의 어느 날,

나는 부푼 기대를 안고 제주에 왔다.

계절이 세 번 바뀌고 마지막 계절이 오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무언가 대단한 것을 찾거나 이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라산에 쌓여있던 눈이 녹고,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고, 다시 눈이 소복이 쌓였다.

자연이 매 계절을, 매 순간을 충실히 살아내는 동안

나는 내 시간에 충실했을까?


어느 날은 성심을 다해 살았고,

어느 날은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무기력해졌고,

또 어느 날은 게으름에 늘어져 시간을 허비했다.


최선을 다해 살아낸 시간보다 의미 없이 흘려보낸 시간에 후회가 남고,

작게나마 이뤄낸 것들보다 더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에 미련이 생긴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현재에 만족하며 기쁨을 느끼는 것이라던데,

나는 아직 욕심만 앞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인가 보다.

그러나 한라산에 눈이 내렸고, 기어이 겨울은 왔다.

나는 이제 패딩을 꺼내 입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후회와 미련은 과거에 묻어두고, 눈앞에 펼쳐진 새하얀 눈밭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가을이, 잃은 것들을 향해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계절이라면

겨울은, 그것들로부터 등 돌려 담담히 앞으로 걸어 나가는 계절이다.

과거의 모든 나와 작별하고 새로운 나를 맞이하는 계절.

그래서 겨울은 공허와 설렘, 시림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계절이다.


찬 바람이 불자, 거리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따스한 불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거리는 더욱 빛날 것이고,

우리는 사람들의 온기로 허전한 마음을 채울 것이다.

종로에 웅장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날,

우리는 들뜬 함성으로 시작의 두려움을 설렘으로 달랠 것이다.


이 겨울, 성숙하게 이별하고 굳게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또 한 번 애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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