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동자신(자신)
자(子)가 늘 가서 앉는 바위에도 가보고 커다란 나무 아래도 가봤다. 키 큰 나무 위도 훑어보고 깊숙이 숨은 개울에 가봐도 자(子)의 흔적이 없다. 분명 엊그제 온 영감을 쫓아간 게 분명하다.
얼추 흰머리가 다 덮었고 그마저 몇 가닥 되지 않는 영감이 꾀죄죄한 몰골로 기어 들어온 건 한낮이 넘은 뒤였다. 구름이 반이나 가려 어둑할 즈음 생쥐처럼 골짝으로 올라왔다. 눈을 휘번득거리며 이쪽저쪽을 살피더니 어느 나뭇가지 아래에 섰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옆에 앉았던 자(子)가 영감 주위를 왱왱 돈다. 멀찍하니 선 잡신들도 군침을 삼킬 즈음 난데없이 가슴에서 기다란 쇠붙이를 꺼낸다. 픽픽 엄지를 누르자 기다란 쇠붙이 끄트머리에서 새파란 불꽃이 솟는다.
"어어! 위험해!"
자(子)가 고함을 질러도 영감에겐 닿지 않는다. 다시 한번 주위를 살피던 영감은 이제 막 새잎이 만발하고 꽃봉오리를 맺고 있는 배롱나무 가지에 그 불을 댄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생가지는 난데없는 공격에 뻗대다가 파르르 떤다. 얼마나 떨었던지 온 가지가 흔들리고 단단한 몸체 아래 뿌리를 묻은 흙이 다 갈라진다. 자(子)가 뛰어오른 건 그 찰나였다. 짧은 다리로 영감의 몸을 후려 찬다. 맨손으로 불을 막는다. 두 손으로 영감의 옷자락을 잡아채다가 아예 두 발을 어깨에 딛고 올라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온갖 공격에도 영감은 멀쩡하다.
"젠장 웬 두통이야!"
저도 이상했는가. 잠시 불을 끄고 이마를 한 번 쓱 짚고는 다시 가지를 태운다. 우우 오래된 소나무며 잣나무 덩걸이 모두 돌아보고 잡목들이 총집중하여 들여다봐도 멈출 방법이 없다. 오가던 노루도 멀찍이서 귀를 기울이고 산토끼도 어딘가로 달아난 지 오래다. 영감의 독무대다. 몇 해 전에 애써 옮겨와 이제 뿌리를 제법 내린 배롱나무다. 유월경부터 붉은 꽃봉오리가 맺히고 몇 가닥 봉오리가 펼쳐져 벙글거리기 시작했는데 그 모양을 시샘하는 걸까. 꽃이 만발하면 다시 오리라는 그이의 기대를 듣고 하루 이틀 그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나무는 이 무슨 날벼락인지. 차마 볼 수 없어 잠깐 돌아누웠는데 그 새 자(子)가 없어졌다.
영감은 푸릇푸릇 서 있는 배롱나무마다 그 짓을 해놓고 뒤뚱거리며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자(子)가 없어진 것도 그 맘 때쯤이다. 귀를 아프게 하지 않아도 배롱나무가 내 지르는 절규에 가슴이 먹먹해진 자(子)가 저도 모르게 영감의 팔을 물고 따라갔다. 한 번도 벗어나 보지 않은 산자락을 응급결에 빠져나갔다. 붕붕거리는 차를 모는 영감이 욱신거리는지 팔이며 다리를 떤다. 숨소리도 괴상하다. 게슴츠레한 눈을 좌우로 번득이며 누가 보았을까 살핀다. 인적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불룩하던 볼을 더 내밀고 속력을 낸다.
산꼭대기는 난리가 났다. 자(子)가 사라진 건 아무도 모른다. 멀쩡하던 나무가 선 채로 탔다. 같이 몸살을 한 토신이 입은 상처도 나무 못지않다. 오색황토 가운을 화려하게 걸쳐 입고 넘실거리던 토신은 차마 바라보지 못할 만큼 거무죽죽해졌다. 울창한 나무를 품은 땅은 오색 황토로 유명하다. 크고 작은 목신이 둘러서서 만신창이가 된 배롱나무를 지탱하고 있다.
"하늘에서 떨어진 불도 아니고"
"잡목들이 대거리하다가 부딪쳐서 일어난 불도 아니고 우리가 대체 무슨 불을 본 거야?"
"지난해에 왔던 그 영감 맞지?"
"대장 어쩌면 좋겠소?"
팔이 울퉁불퉁한 젊은 목신들은 괜히 날을 세우고 나이 든 목신들은 뒷전에서 과묵하다. 바람 불고 구름 가고 해가 뜨고 지며 숱한 날을 보아왔지만 낫을 들고 베어가는 놈은 봤어도 이런 짓은 또 처음 본다.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젊은 목신들은 제풀에 열이 나서 우우 거린다. 고요하던 산줄기가 시끌시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