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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Sep 14. 2023

출장 가서 일회용품을 안 쓴 이유

호캉스를 좋아한다. 가장 큰 이유는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가 아닐까. 돌릴거나 접을 빨래도, 쓸고 닦을 바닥도, 각종 식재료를 자르고 볶는 부엌도 없기 때문인  듯하다


객실에 들어가자마자 순백의 푹신한 침대에 사지를 쫙 뻗어 누워버리고는 'ON' 버튼을 과감하게 꺼버린다. 놀러 와서 드러눕기부터 시작하는 에미 에비를 뒤로 하고 고학년인 첫째는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아직 어린 둘째 아이는 방에 비치된 메모지나 화장실에 놓인 어메니티를 가지고 소꿉놀이를 시작한다.


환경오염 관련 이슈를 들을 때마다 배달음식을 줄여야지, 쓸 때 없이 물건을 들이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던 나였지만 유독 호텔 내 일회용품에 대한 생각은 깊게 한 적이 없었다. 요즘은 몇 성급 호텔을 가던지 환경을 위해 침구를 며칠 그대로 쓴다던지 일회용품을 줄이는 운동을 적극 권장하고 있지만 솔직히 눈여겨보지 않았다. 호텔에 가는 주요 이유는 힐링이었기 때문에 번잡스러운 생각이나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주 일본 출장을 다녀왔다. 도착한 첫날은 정신없어 모르고 지나쳤는데 둘째 날 하우스키핑 서비스를 받은 후 객실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일회용품 옆에 놓인 동그란 종이 코인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옆에 놓인 설명서를 펼쳐보았다.




객실에 비치된 일회용품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이 취지에 이해와 협력을 해주실 경우, 그린코인을 프런트로 가져와 주시기 바랍니다. 고객 여러분이 기부하신 그린코인은 국제협력 NGO 오이스카가 추진하는 해외 활동인 '어린이의 숲' 계획, 그리고 '숲 만들기 활동'의 지원금으로 전달해 드리고 있습니다.


와, 이렇게 쉬운 환경 보호 활동이 있나.


무얼 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거잖아.


어찌 보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일이지만 이날은 해골물을 먹고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원효대사처럼 머릿속에서 띵하고 종이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쉬운 걸 안 하고 있었구나.




플라스틱 제품 재활용하기, 분리수거 잘하기, 친환경 제품 사기, 환경 운동에 관심 가지기, 나무 심기 등 지구를 위해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있지만 막상 실천하려고 하면 이리저리 어긋나고 어설프게 끝나기 일쑤였다. 그런데 숨만 쉬면서도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있다니.


최근 이슬아 작가의 '날씨와 생활'을 읽고 북클럽에서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철없는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내 모습을 바꾸고 싶어 졌었다. 내친김에 구희 작가의 '기후위기인간'이라는 책까지 읽고 환경 이슈들이 남일이 아니구나. 당장 내 아이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현실로 다가오는 문제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믿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환경운동가 다 되었다. 문제는 가슴 절절하게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어이없게도 현란한 상상만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고기를 좀 줄여보겠어. 플라스틱 제품을 덜 사야지. 배달 대신 그릇을 가져가 받아올까?


기껏 정성스레 고민해 놓고 막상 고기를 안 먹으려고 하니 성장기 아이들이 눈에 밟히고,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려니 일주일 2번 있는 재활용 날에 맞추어 내놓기가 빠듯하다. 배달 대신 그릇을 가져가려는 다짐은 주문 자동화된 검지 손가락이 순식간에 배달앱을 켜버리면서 무력화시킨다. 어찌나 뇌가 내 편리한 데로 휙휙 돌아가는지.


옆에서 종알거리는 아이들 없이 혼자 온 출장에서 지구의 고요한 외침을 들었다.

500년 동안 썩지 않고 돌고 돌아 결국 우리를 침공하는 플라스틱. 당장 플라스틱 없는 세상으로 바뀔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불필요한 소비는 줄일 수 있지 않겠냐고.


기후위기인간에서 구희 작가가 말한다.

'아주 사소한 행동이라도 시작한 사람만이 변화를 만들 수 있다. 나는 작지만 의미 있는 선택을 하기로 다짐했다. 좋은 선택과 의미들로 내 삶이 채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호텔에서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는 아주 작은 행동이 변화의 씨앗이 되어 지구에게 친절한 인간이 되어가는 나를 상상해 본다. 이 보다 더 흐뭇하고 안심되는 상상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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