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멈춤의 시간, 그리고 다시 불려 나간 시장

by 데미안

입사 6개월 만에 마주한 폐업. 뜨거웠던 열망이 식기도 전에 차가운 현실을 먼저 삼켜야 했다. 두 번째 실패는 첫 번째보다 더 조용하게, 하지만 더 깊숙이 나를 파고들었다.

모니터를 끄고, 지표를 지웠다. 어지러운 세상의 소음을 뒤로한 채, 나는 나만의 정적 속으로 숨어들었다.


몇 달간의 사투로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는 데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여행, 그리고 정갈하게 쓰인 책들이 필요했다. 그녀와 함께 낯선 길을 걸으며 비로소 내 삶의 닻이 어디에 내려져 있는지를 확인했다.


불안에 쫓겨 앞만 보고 달릴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속도를 줄이자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논리적 사고의 틀을 다루는 책들을 탐독하며, 지난 실패의 파편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복기했다.


그것은 자학이 아닌, 다음 항해를 위한 철저한 '오답 노트'였다. 그렇게 치열했던 몇 개월의 사투는 평온한 일상의 조각들로 조금씩 치유되고 있었다.


다시 커리어의 지도를 펼쳐 들었을 때, 뜻밖의 제안이 도착했다. 시리즈 C까지 950억 원, 누적 투자액 1,500억 원을 기록하며 시장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라이징 스타트업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제안한 직무는 '신사업 개발(New Business Development)'.


사실 사업 개발이라는 직무의 정의는 회사의 규모와 스테이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어떤 곳에서는 세일즈의 연장선이고, 어떤 곳에서는 전략 기획에 가깝다.


하지만 이번에 나에게 주어진 미션은 명확했다. 러프하게 그려진 사업 모델을 고도화하여 단단한

'수익 구조'로 만드는 것. 단순히 파트너십을 맺는 것을 넘어, 양사의 영업 담당자들이 실질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최적의 '영업 환경'을 설계하는 일이었다.


여기에 더해, 물류 효율화의 핵심인 WMS(창고관리시스템) 솔루션을 비즈니스 모델과 함께 딜리버리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과거의 내가 '무엇(What)'을 팔 것인가에 매몰되었다면,

이제는 '어떻게(How)'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했다. 거대 자본의 유입으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있는 조직에서, 나의 실패 경험이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느꼈다.


실패를 통해 배운 PMF(제품-시장 적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숫자의 이면을 읽는 눈은 이제 든든한 투자금이라는 날개를 달고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오를 준비를

마쳤다.


다시 0(Zero)의 지점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 0은 예전의 0과는 다르다.

수많은 마이너스(-)를 견뎌내며 다져진, 가장 단단하고 묵직한 시작점이다.

긴 휴식을 끝내고, 나는 다시 한번 신발 끈을 조여 맨다.

이번에는 나 혼자만의 질주가 아닌, 시스템과 파트너가 함께 움직이는 거대한 파도를 만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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