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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Dec 05. 2023

그래, 나 도시락 까먹었다  

점심 시간 전에 도시락을 까먹어도 할 말이 있다

2023. 12. 4.

< 사진 임자 = 글임자>


"오늘도 너희가 좋아하는 반찬 나오네. 좋겠다. 맛있게 먹고 와."

매일 평일 아침 7시가 넘으면 그날의 학교 급식 메뉴 알림이 온다.

첫사랑에게 받는 러브레터보다 더 설레며 기다려지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사진 속 떡이지마는.


"너흰 정말 좋은 세상 산다. 엄마는 도시락 두 개씩 싸가지고 다녔는데."

부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회상에 잠기며 말했다.

"도시락을 왜 싸 가? 급식 먹으면 되지."

딸이 기어코 엄마의 전과를 들춰 보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것은 마치 엄마가 얼마나 옛날 사람인지를 다시 한번 증명해 보이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이것은 흡사 옛날 옛날 한 옛날에 누군가가 백성들이 을 못 먹고 있다니까 케이크를 먹으면 될 일이 아니냐고 그랬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이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의견도 있는데) 그와 같은 상황이었다.

"급식이 없었으니까 그렇지."

급식에서 급식까지, 유치원 생활을 시작으로 어린이집을 비롯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단체생활의 8할은 온통 '급식'이었던 딸은 어리둥절해했다.

"왜 급식이 없었어? 학교에서 안 줬어?"

나는 다시금 딸과의 세대차이를 실감하며 과거를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는 급식 세대가 아니야. 엄마가 고3 때인가 그때 막 급식실을 짓기 시작했거든, 그래서 엄마는 급식 구경도 못해보고 맨날 직접 도시락 싸가지고 다녔지. 그때 엄마는 자취했었거든."

"세상에, 학교에서 급식도 안 했어? 도대체 언제 적 얘기야?"

이쯤에서 그만 멈추었어도 좋을 것을 딸은 엄마가 얼마나 자신과 차원이 다른 세대의 사람인지 선을 확실히 긋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급식도 안 먹었대? 아빠는 급식 먹었는데."

이러면서 눈치 없이 또 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 모녀의 대화에 찬물을 확 끼얹는 불청객이 한 명 있었으니.

"우와, 아빠는 급식 먹었어?"

딸이 반색을 했다.

옛날 사람인 엄마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어느새.

"그럼. 아빠는 급식 먹고 다녔지. 아빠는 너희 엄마랑은 달라."

어허,

이 양반이 또 선을 넘으려고 그러시네?

"그래도 엄마는 배고플 때 먹고 싶을 때 도시락 먹었어. 너흰 급식 시간이 돼야 먹을 수 있잖아."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화제를 전환해 보았다.

"도시락은 점심시간에 먹는 거 아니야?"

딸이 다시 내게 관심을 보였다.

"보통은 점심시간에 먹으려고 싸가긴 하는데, 배고프면 그전에 먹을 수도 있지."

"언제?"

"보통 1교시나 2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에. 물론 학교에 오자마자 도시락 먹는 친구도 있었고. 근데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어."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도시락 까먹는다'라고 한다지 아마?

나 혼자만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중간에 도시락 먹으면 어떡해? 교실에서 냄새나고 그러는데. 환기는 잘했어?"

결국,

기어코,

한사코,

기어이,

기필코,

이 양반이 선을 넘는구나.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 급식세대가 아닌 사람들 중에서 왕년에 쉬는 시간을 틈 타 도시락을 단 한 번이라도 안 까먹어 본 자가 있다면 우리 집 식판을 모조리 압수해도 좋다.

내가 알기로는, 단언컨대,

'도시락을 안 싸 오는 학생은 있어도 도시락을 한 번도 안 까먹어 본 학생은 없다'고 (근거는 없지만) 확신한다.

학교는 자고로 도시락 먹는 재미로 다니는 게 아니었던가?

그리고 쉬는 시간에 잽싸게 도시락 까먹는 것은 '학창 시절의 꽃'이고 말이다.(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어디에선가 이와 같은 생각에 격하게 동감하는 숨은 동지가 한 명쯤은 있다고 믿고만 싶다.)


"아니 어떻게 점심시간도 아닌데 도시락을 까먹을 수가 있어?"

마치 나를 야만인이라도 보듯 하는 그 양반의 얼굴에 나는 뜨악해졌다.

"도시락만 안 까먹었으면 뭐햐? 체육시간 끝나고 세수도 않고 냄새 풀풀 나는 체육복도 안 갈아입고 그대로 앉아 있었던 거 난 다 알아!"

아무 말 대잔치는 이럴 때 하라고 있는 거다.

여고생 VS 남고

(사실 그대로 진술하자면) 청순하지만 배고픔에는 다소 마음 약한 여고생들의 일탈과 우락부락하고 혈기 왕성한 사춘기 남학생들의 체육시간을 갓 넘긴 후의 무지막지한 냄새, 둘 중에 어느 것이 선생님들께 더 고역일까?

(물론 양심상 둘 다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앙케트 조사는 해 본 적이 없으려나?

하마터면 세기의 대결이 될 뻔했던 것을 이제는 학교 급식으로 말미암아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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