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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Dec 03. 2023

파격적인 시어머니

결단  내리셨구나

2023. 12. 2.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여긴 비 오는데 거기도 비 와요, 어머님?"

"응, 여기는 조금 오다 그쳤다."

"비 오니까 많이 쌀쌀해졌죠?"

"그래, 다 잘 있냐? 나는 어제 김장했다."

"벌써 하셨어요? 올해는 몇 포기나 하셨어요?"

"얼마 안 했다. 30 포기만 했어. 나도 힘들어서."

"그러셨어요? 많이 줄이셨네요. 그래도 고생하셨겠어요."

"이제는 많이 못해, 나도 아파서. 그래도 엄마도 주고 딸네도 주고 하려고 좀 했다."

또 아침 일찍 시가에 전화를 해봤다.

엊그제 통화했지만, 그때는 바람이 많이 불어서 한 거고 오늘은 비가 오니까.

마치 밥 배가 따로 있고 간식 배가 따로 있는 것처럼 안부전화도 강풍용과 우중(雨中)용은 따로따로다.


어머님 말씀대로 올해 김장 수준은 가히 파격적이었다.

30 포기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양이다.

(친정에서 김장할 때 매년 나 혼자서도 50에서 100포기 정도는 했다.)

반칙이긴 하지만, 물론 모든 양념이 다 준비된 상태에서 배추에 바르는 일만 따진다면 말이다.

김장 준비하는 것부터가 보통 일이 아니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고된 노동이라는 것을 잘 안다.

"아무리 그래도 조금은 해야 되니까 하기는 했다. 너는 진짜 안 줘도 되겠냐?"

"네. 괜찮아요. 합격이 아범이 출장을 많이 다녀서 김치 얼마 안 먹고 저희 식구들이 다들 많이 먹는 편은 아니잖아요. 조금씩 만들어 먹든지 하면 돼요. 그리고 합격이 아범은 겉절이를 좋아하니까 그때그때 만들어 먹어요."

"그래. 무조건 많이만 만들 필요도 없지. 너희는 주지 말라고 해서 안 보냈다."

"잘하셨어요. 날도 안 좋고 김장하느라 고생하셨는데 물리치료라도 받으러 가지 그러셨어요?"

"그래, 안 그래도 힘들어서 가려고 했다."

"버스 타지 마시고 택시 타세요 어머님."

어머님은 무릎이 안 좋아서 버스 타기도 힘드시다.

아버님도 같이 병원에 다니시니까 두 분 버스비에 조금만 더 보태면(조금은 아니겠지만 분명히) 택시를 타는 편이 훨씬 더 낫다고 며느리는 또 잠깐 오지랖을 떨었다.

어른들이 알아서 하실 일이지만, 며느리가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 한다고 곧이곧대로 할 분들도 아니지만 말이다.

"양념 남은 거 있으니까 나중에 합격이 아범 오면 좀 보낼까?"

"그럼 저는 좋죠. 조금만 주세요. 고맙습니다, 어머님."

김치 만드는 일은 양념이 8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것만 있으면 완전 거저 아닌가?

김장할 때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양념 얘기에 귀가 솔깃해진 며느리는 양심에 좀 찔리긴 했지만 어머님의 성의를 생각해서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나만 혼자 숨겨 놓고 먹을 것도 아니고 어머님의 아들도 먹고 손주들도 다 먹을 예정이니까 고맙게 받으면 그만이다.


결혼 초기 시가의 김장 때 배추 200 포기는 기본이었다.

친정도 당시 그 정도(평균 200포기)였으므로 놀라울 건 없었다.

양가에서 점점 그 양을 줄이시더니 올해는 정말 어머님이 큰 결심을 하신 것 같았다.

그나마 가장 최근에 내가 가서 김장했을 때는 120에서 150 포기 사이였는데 '고작(정말 고작이라는 말밖에)'30 포기라니. 물론 무릎도 안 좋은데 그 30 포기도 어머님께는 300 포기처럼 무겁게 느껴지셨을 것이다.

시동생과 시누이가 와서 같이 김장을 하고 각자 몫을 챙겨갔다고 하셨다.

아들이 너무 바쁘다는 말에 언제 김장을 하겠다는 언질도 없이 그냥 하셨나 보다.

얼굴도 안 비친 며느리지만 그래도 양념이라도 주고 싶다는 어머님,

눈 한번 질끈 감고 염치 불구하고 냉큼 받아먹겠다는 며느리,

어머님과 나는 그냥 그런 고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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