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Dec 04. 2023

그 동생의 ctrl+v

아닌 것 같은데, 맞는 것 같아

2023. 12. 2.

< 사진 임자 = 글임자 >


"누나,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집에서도 학교 시험 보는 것처럼 해야지. 학교에서 시험 볼 때도 그렇게 할 거야? 답안지를 보면 어떻게 해? 혼자서 끝까지 스스로 풀어보고 계속 고민을 해봐야지. 답안지 보고 맞춰 보면 진짜 자기 것이 안된다니까! 내가 혼자 힘으로 풀어 보고 고민을 해봐야 진짜 자기 것이 되는 거야. 그렇게 해야 그래야 실력이 느는 거라고. 답안지에 의지해서 하면 다음에 이 문제 또 틀려. 학교에서 시험 볼 때 선생님한테도 답안지 보여 달라고 할 거야? 문제집 풀 때도 학교 시험처럼 해야 하는 거야. 알겠어? 자, 다시 풀어 봐."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 집 최연소자인 멤버,

초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자랑스러운 아드님의 훈화 말씀이다, 제 누나를 상대로 한.

내일모레면 11 살이 되는, 오늘 날짜 기준으로 10 살, 우리나라도 이제 만 나이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니 한사코 '만으로는 '9 살'이라고 주장하는 어린이.

가만,

내가 저 아드님 태교를 어떻게 했더라?


일요일 내내 딸의 문제집을 채점하다가 집안일을 하다가 다시 채점을 하다가 양심적으로 내가 감당 못하겠는 것은 수학 경시대회 수상 경력이 있는 멤버(그 멤버는 저 과거를 한없이 우려먹는 중이었으므로 나는 그에 맞는 대접을 해주어야 마땅했다. 그리고 우리 집 성인 멤버 둘은 소신껏 각자의 재능을 기꺼이 자녀들에게 기부해 왔는데 수학은 그 멤버의 몫이었다. )에게 미련 없이 패스를 하고 다시 내가 채점을 하기를 반복했다.

딸은 초등 5학년인데 예전에 풀다 만 수학 문제집을 최근에 다시 풀기 시작했다.

딱히 몇 학년용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전혀 쉬운 문제집이 아니었다. 수학에 약한 나였지만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라 다른 성인 멤버도 동의했으므로 느닷없는 동지애마저 느끼게 해 주는 요망한 문제집이었다.

딸의 문제집을 보면서 나는 새삼 안도했다.

지금 내가 딸 또래였다면 저 어려운 문제집을 붙들고 절망했을지도 모른다.

딸보다 30년 먼저 태어난 게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번 고쳐 죽어 다음 생에 인간으로 다시 환생한다 하더라도 마흔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 이 순간이 눈물 나게 고맙다.(고 철없는 생각까지 다 해봤다.)


삼각형 두 개를 가지고 어떤 답을 내는 것이었는데 경우의 수를 모두 구하라는 것이었다.

정답은 자그마치 11가지나 됐다.

더 이상 '호한, 마마, 불법 비디오테이프, 호랑이' 따위가 무서운 세상이 아니었다, 물론 적어도 나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모두 구하라'는 그 문제가 가장 무섭다.

하나면 하나, 두 개면 두 개 이렇게 딱 정해주고 하라면 대강 찍기라도 하겠는데 모든 경우의 수를 구하라니!

자그마치 그것도 주관식으로 말이다.

답안지를 이리저리 돌려 가보면서 딸의 답과 맞춰 보는데 모양이 비슷비슷해서 너무 헷갈리는 것이다.

급기야 나는 색종이를 가지고 삼각형 두 개로 직접 맞춰보기로 했다. 때론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 가장 확실한 해답일 수 있었으므로. 유치원 어린이도 아니고 난데없는 색종이 놀이가 모양이 좀 빠지긴 했지만 말이다.

한참을 요리조리 맞춰 보는데 혼자 잘 놀던 아드님이 등장하셨다.

"엄마, 내가 해 볼게. 나 잘할 수 있어."

누나도 두 번이나 틀려서 지금 세 번째 다시 풀어 본 건데 열 살인 네가 해 보겠다고?

엄마도 뭔지 도통 헷갈리기만 하는데?

"우리 아들이 나설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엄마도 너무 헷갈려 지금."

"아유, 엄마. 나 잘한다니까!"

솔직히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평소 낄 데 안 낄 데 구분 못하고 불쑥 끼어드는 누구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는 사이, 아드님이 내가 들고 있던 답안지를 잽싸게 뺐었다.

"자, 엄마, 봐봐. 엄마는 나이도 많아서 보기 힘들 거야. 내가 채점해 줄게."

이렇게 갑자기 엄마 나이를 들먹이면서 말이다.

슬픈 사실은 아들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다는 것이다.

한다면 해버리는 어린이가 바로 그 아드님이시다.

나는 차라리 자포자기해 버렸다.

그렇지 않는다고 한들 거기서 물러설 아드님도 아니셨거니와.


"그래. 그럼 우리 아들이랑 같이 봐 보자. 그럼 더 빨리 찾겠다."

마지못해 아들을 옆에 앉히자마자 쾌거를 이루었다.

"엄마, 이거 여기 있잖아. 이게 왜 안 보여? 이렇게 잘 보이는데, 엄마는 참. 내가 할 테니까 엄마는 가서 쉬어요. 엄만 잘 못 찾잖아."

뭐지, 나를 생각해 주는 것 같아 기특하면서도 묘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것도 같네?

희한하게 아들이 옆에 오자마자 내 눈에도 그게 잘 보였다.

졸지에 나는 눈뜨고도 답을 못 찾아내는 엄마가 되고 말았다.

이에 자신감이 급상승한 어린이는 엄마와 누나에게 설교를 곁들인 오지랖을 떨기 시작했다.

사실, 아들의 ctrl+v는 거저 나온 것이 아니다.

누나의 ctrl+c가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2,000년 경에.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다 싶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언젠가 딸이 아들의 문제집을 채점하면서 했던 말을 아들이 고스란히 제 누나에게 들려준 것이다.

그러니까 눈에는 눈, 훈화 말씀에는 훈화 말씀이었다.

물론 딸 이전에 또 엄마의' B.C ctrl+c'가 있었고 말이다.


뜬금없이 아들의 (전혀 확인되지도 않은) 천재성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그 상황에서 '천재'란 단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최소한 지금 나올 단어는 아니란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들,

혹시,

천재 아니야?

아니다.

천재는 아니야.

그런데 대단한 것 같아,

물론 엄마 눈에만.

그렇다면

.

.

.

.

.

.

.

.

.

.

.

.

.

.

.

혹시?

만재?

그래,

만재다, 만재!


작가의 이전글 파격적인 시어머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