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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Dec 09. 2023

내가 너희를 어떻게 키웠는데

둘이라도 잘 키우자

2023. 12. 8.

< 사진 임자 = 글임자 >


어떤 시험이랑 많이 닮았다.

포기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그 시험,

그러면 언젠가 붙는다는 그 시험,

레몬밤도 그렇다.


올봄에 여러 종류의 허브들을 심어 보았으나 두 번이나 전혀 소득이 없었다.

차라리 절망스러웠다.

물론 처음 도전해 본 일이라 내가 많이 어리숙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화분을 사서 기르는 일에는 어느 정도 능숙한 편이었으나, 씨앗을 심어 싹을 틔우고 길러 내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라벤더나 애플민트 같은 허브는 씨앗 심은 자리도그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마지막에는 오기에 가까운 마음으로 심은 레몬밤만 소소한 결실을 맺었다.


세 번째 도전에는 나름 연구라는 것도 해 봤다.

영상을 찾아보며 어떻게 레몬밤 싹을 틔워야 하는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성장 조건은 어때야 하는지 등, 뿌려만 놓으면 끝이 아니었으므로 나도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 했다.

그렇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린 끝에 선택한 것이 레몬밤 씨앗을 물에 살짝 담가 항상 촉촉한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었다. 사나흘 정도 그렇게 했는데 내 눈에는 티끌만 한 그 씨앗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다소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그냥 화분에 옮겨 심었다.

그 후 매일 물을 조금씩 주고(물을 주면서도 저러다가 씨앗이 물에 썩어버리는 건 아닌가 미심쩍은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볕이 잘 드는 거실 창가에 아침마다 놓아주었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였던가, 처음 정체 모를 싹이 텄고 나는 출산의 기쁨에 버금가는 경이로움마저 느꼈다.

역시, 포기하지 않으니까 되긴 되는구나.

물론 전에 썼던 글에서 밝혔지만 그 자그마한 화분에 돋은 애매한 싹들이 전부 레몬밤은 아니었다.

8할은 풀이었다.

생각해 보니, 친정집에 있던 화분 흙을 그대로 가져와 거기에 심었더니 숨어 있던 풀 씨앗이 우리 집으로 와서 싹트기 좋은 환경이 되었던가 보다.

언제나 내가 원하는 허브보다 풀들이 먼저 고개를 내민다.

풀들이 더 튼튼하게 잘 자란다.


우리 집에서 키우던 풀과 레몬밤이 한데 돋은 화분을 9월 말에 과감히 친정집 마당으로 옮겼다.

갓 태어난 아기를 바깥에 내놓는 것처럼 아깝고 불안하고 조심스러웠지만 강하게 키우려면 눈을 질끈 감을 즐도 알아야 한다는 게 내 어설픈 신념이다.

내가 찾아봤던 영상에서는 가을보다는 봄에 허브가 싹도 더 잘 틔우고 잘 자란다고 했지만, 가을은 추천하지 않았지만, 이왕 싹이 텄으니 어떻게든 길러내야 했다. 날도 점점 쌀쌀해지고 있어서 솔직히 나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고는 말 못 한다.

그 연하디 연한 잎이 찬바람을 맞고 시들어 죽어버리면 어쩌나, 아직 한낮에는 햇볕이 강한데 타 죽는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살면서 과감히 결단 내려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내게는 그때가 그랬다.

레몬밤이 좀 더 튼튼하게 자라기를 바라며 당분간만이라도 실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냥 마당에 놓고 키우기로 했다. 더 쌀쌀해지기 전에 실컷 바깥바람을 맞고 자라게 하다가 우리 집으로 데려올 생각이었다.

신통방통한 것이 친정에 갈 때마다 눈에 띄게 야무지게 자라고 있었다.

거의 한 달을 바깥에서 키우고 10월 말 경에 우리 집으로 가져왔다.

그러니까 싹이 튼 후 한 달 정도 바깥에서 키우고 한 달 정도 실내에서 키우는 중이다.

키는 많이 자라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가운데 줄기는 제법 단단했다.

이젠 만져보면 살짝 향도 난다, 나는 것 같았다, 날 것이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던 시절이 있었다지?

혼자라면 외로울 텐데 다행히 두 그루다.


여전히 아침이면 블라인드를 밀치고 햇볕이 가장 따뜻하게 드는 자리를 찾아 환기를 하며 레몬밤 화분을 창가에 올려 둔다. 겨울이라 확실히 성장 속도가 더딘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무사한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자신감은 이렇게 생기는가 보다.

확실한 성공 경험, 백 번 보고 들어 봐야 내가 직접 겪어본 일이 최고의 배움이다.

어서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다.

내년에는 더 많이, 더 잘해봐야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욕심이 움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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