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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Dec 29. 2023

2023 올해의 방구석 사자성어

쇼핑만이 네 세상

2023. 12. 23.

< 사진 임자 = 글임자 >


"싸다고 무조건 사면 안돼."

그 양반이 출동하셨다.

"걱정 마, 아빠. 안 그래."

아들이 대꾸했다.

정작 우리 집 멤버들이 걱정해야 할 사람은 아들이 아니라,

요주의 인물, 바로 그 양반이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내 생각에는.


"아빠도 세일한다고 무조건 사서 안 쓰고 그런 것도 좀 있어."

어라?

이 양반이, 알고 보니 양심은 있었네?

"그런 게 좀 있는 게 아니라 그런 게 꽤 있었지."

라고 조금의 관용도 없이 사실 그대로를 말해야만 했다, 나는.

그 양반의 적절치 못한 발언을 반드시 정정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나는 그날 잠을 잘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부부란 자고로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틀린 말을 하면 바르고 정확하게 짚어주고 정정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나만 혼자 생각한다.)

"아빠, 나는 필요한 것만 살 거야. 무조건 안 살 거야."

아빠와는 확실히 다르다고, 그 양반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가끔은 소비행태를 보았을 때 그 양반을 보는 건지 아들을 보는 건지 헷갈리게 만드는 아들이 거듭 강조하셨다.

동시에 학년 말 바자회 행사를 앞두고 아들은 가져갈 물품을 심혈을 기울여 선정하고 계셨다.


"아무튼 가격이 싸다고 거기에 혹해서 무조건 사면 절대 안 돼. 아빠가 좀 그런 적이 있어서 말이야."

아니 이 양반이?

이제와 뒤늦게 철이 드는 것인가, 아니면 전 멤버 앞에서 담담히 회개하는 것인가!

"좀이 아니라 많이 있었지."

입도 안 비뚤어졌는데, 말도 똑바로 해야겠지.

그래, 맞는 말씀이지.

세일한다고, 특가라고, 떨이라고 무조건 저지르고 보던 사람이 바로 그 양반이었지.

그 양반의 내부에서 뭔가 동요되고 있는 것일까.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순순히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런 그 모습에 나는 더 극도의 불안을 느낀다.

사람이 안 하던 행동을 하면 어떻게 된다더라?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 양반은 사버린다.

가뿐하게.

이번에는 우산을 다섯 개만 사셨다.

비상용이라고,

혹시 모르니까, 라며 언제나 쇼핑의 구실은 있었다.


"싸다고 무조건 사지 마. 싸다고 사면 싸니까 대충 쓰고 관리하다가 결국 버린 게 한 두 개가 아니잖아. 과일 같은 것도 싸다고 사가지고 결국 다 먹지도 못하고 버려서 알고 보면 딱 그 가격만큼만 먹은 셈이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야? 그런 건 돈을 버리려고 사 온 거나 마찬가지지 뭐. 아무튼 사기 전에 신중히 생각하고 결정해, 제발!!!"

말하는 이는 있어도 듣는 이는 어디에도 없다.

내가 그 양반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사랑해."

라든가

"고마워."

라든가

"미안해."

라든가

"당신이 최고야."

라든가

"당신밖에 없어."

라는,

누가 들을까 무서운 저런 말이 아니다.

저 해괴망측한 모든 말들을 아우르는 한 마디,

나의 가장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그 한마디,

압도적인 네 글자가 있다.

굳이 사자성어로 (내 마음대로, 얼토당토않게) 꿰어 맞추면

" 그 만 좀 사 "

바로 그것이다.

해년마다 전국의 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 이런 것을 선정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올해는 견리망의(見利忘義)라던가?


그래, 너로 정했다.

올해의 '우리 집 사자성어'는

'그만좀사'이다.

그만 좀 사, 올해도, 내년에도, 내 후년에도, 쭉~

아니, 그건 무리일 수도 있겠다.

그 양반에겐 너무 가혹하지.

얼마 남지 않은 올해 며칠만이라도,

제발,

제발,

그만 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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