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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Dec 28. 2023

그냥 입덧이야, 입덧!

누울 자리 보고 아무 말 대잔치도 하시라

2023. 12. 23.

< 사진 임자 = 글임자 >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렇게 난리야?"

 

일요일 아침 딸이 자고 일어난 자리에 바닥과 덮는 이불 모두 피가 묻어 있었다.

왼쪽 어깨 부분 내복에는 제법 피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이런 걸 보고 기겁하지 않을 엄마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이 인간이 정말!

또!


"하여튼 너희 엄마는 왜 목소리가 그렇게 큰지 몰라. 아무 일도 아니야. 그런 거 가지고 왜 그렇게 야단이야?"

"느닷없이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는데 이런 게 놀랄 일이 아니면 도대체 뭐가 놀랄 일인데? 나도 모르게 나온 거라고. 본능적으로! 갑자기 피가 이렇게 나는데 이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본인 혼자만 아무 일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지 피를 보고 놀란 내가, 내 목소리가, 야단법석이 그렇게도 불만인지 같은 소리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또,

별 게 다 마음에 안 든다 이거지, 내가?


"합격아, 너 왜 이렇게 피가 많이 났어? 또 코피 났어? 심한데? 이불이랑 내복에 다 묻었어."

정말 처음에 나는 딸이 코피라도 왕창 쏟은 줄 알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나지 않았던 코피가 초등학교 1학년 부터 3년 동안 거의 밤마다 쏟아지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아이들은 으레 그런다고 별 다른 말이 없었다.

그럴 수도 있다는 말 뿐이었다, 갔던 병원마다.

으레 그럴 수 있어도, 많은 아이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 딸이 밤마다 코피를 쏟으면 또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이 human아! 제발 가만히나 있어! 내가 호들갑스럽긴 뭐가 호들갑스럽다고 그래? 자식이 자다가 갑자기 피를 흘렸는데 놀라지 않을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어? 하긴 누구 같은 인간은 전혀 놀랍지도 않겠지. 저런 게 있었던 것도 몰랐던 사람이니까. 말해 줘도 건성으로 흘려듣고, 알려 줘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할 게 뻔하니까. 본인이 의사야? 뭘 안다고 나서, 나서길! 아무것도 아닌지 아무것인지 본인이 어떻게 안다고 마음대로 판단해? 무슨 말만 하면 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더라. 그런 건 본인 신변에 관한 것만 그렇게 믿고 살아. 왜 애들한테까지 무조건 그래? 본인은 조금만 이상해도 무슨 큰일 난 줄 알고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떨고 미친 듯이 검색하면서 알아보는 인간이 자식 일에는 왜 그렇게 태평해? 그러는 본인은 도대체 별일인 게 뭔데? 갑자기 자식들 신체에 변화가 생기면 알아보고 살펴보고 진료도 받아보고 해야 하는 거지 무조건 별 일 아니라고 넘어가면 다야? 함부로 판단하지 좀 마. 본인한테는 아무 일 아닐지 몰라도 나한텐 큰 일이야. 이런 게 큰일이 아니면 도대체 뭐가 큰일인데? 아까 피 흐르는 거 안 봤어? 피가 철철 났잖아. 나는 가슴이 철렁했었다고! 어떻게 그런 광경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지? 나도 누가 피 흘렸다면 신경 안 써. 근데 자식이 피를 흘렸잖아, 갑자기. 너무 놀라서 목소리가 커진 게 그게 그렇게 잘못이야? 아무리 내가 꼴 보기 싫어도 그렇지 그게 그렇게 인상까지 써가면서 말할 일이야? 누가 피 흘려도 난 상관도 안 할 거고 관심도 없지만 애들 앞에서 나 혼자만 유난 떤다느니, 목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듣기 싫다느니 그런 말로 애들 선동하지나 마! 본인 생각을 애들한테까지 주입시키지 말라고. 본능적으로 놀라서 소리 지른 게 그렇게 잘못이야? 내가 일부러 그랬어? 작정하고 소리 질렀냐고! 내가 너무 놀라서 그랬다잖아! 하긴, 합격이가 몇 년 간 밤마다 코피를 그렇게 쏟을 때마다 내가 악을 쓰고 깨워도 잠만 잘 자던 사람이니 오죽하겠어? 코피가 정말 덩어리로 쏟아진 게 한두 번이 아닌데 난 그때마다 정말 큰일 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 본인한테는 이 정도 피는 아무것도 아니겠지. 본인은 별일도 아니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세상사람들이 다 똑같이 생각하지 않아.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별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야지!"

라고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말하지 않았다, 물론.

인연 없는 그 중생을 굳이 내가 구제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건 지장보살님께 패스~

놀랐을 때는 놀라움을 나타내고 기쁠 때는 기쁨을 표현하고 그냥 그렇게 살고 싶다.

절대 억지로는 말고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말이다.

너무 놀라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나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을.

저 상황에서 갓 시집온 새색시처럼 소곤소곤

"어머, 우리 딸이 피를 다 흘렸네. 저런, 내복이 흠뻑 젖은 것도 모라자 요와 덮는 이불까지 핏물이 들었잖아? 괜찮아 괜찮아, 피가 철철 흘러내리긴 했지만 아무것도 아니야. 그 정도로 어떻게 되지는 않아. 걱정할 거 없어. 별 것도 아니야."

라고 이렇게 태연히 말해 줬어야 했을까?

"그렇게 소리 지르면 애들이 더 놀란다고. 나을 것도 안나아."

그렇게 냉철할 수가 없는 그 인간은 내게 이렇게 주장했다.

물론 무조건 내가 그 의견에 반발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딸이 더 놀랄 수도 있겠지만 본능적으로 반응한 후 상황 파악을 마치고 나면 나도 평정심을 이내 찾을 것이다. 누가 몰라서 그러냐고, 내 말은.

그러나,

내가 그렇게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고 해서 '나을 것도 안 낫는다'는 그 말은 도대체 뭐지?

말이야? 막걸리야 도대체?

내가 뭘 어쨌기에?


얼마 전부터 딸의 왼쪽 어깨 쪽에 뭐가 생겼다.

여드름은 아닌 것 같고 피가 뭉친 것처럼도 보이고 점 비슷하게도 보였다.

피부에 없던 게 갑자기 생기면 안 좋은 거라는 말을 들은 게 있어서 주시하고 있던 차였다.

더 커지거나 아파하거나 하면 병원에 가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내복과 이불에 피가 젖어 일어났으니 내가 안 놀랄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 부위가 살점이 뜯긴 것처럼 돼 있고 피가 주르륵 빠르게 흘러내렸다.

그래서 내가 기겁했던 것이다.

그런데 누구는 나보고 호들갑을 떤다, 유난스럽다, 목소리가 크다, 시끄럽다 이렇게 핀잔을 주는 것이다.

내가 분명히 여러 번 밝혀 왔지만 그 대상이 자식이라 더욱 그랬던 거다, 나도 모르게.

게다가 올해 아들이 백혈구 수치가 며칠 연달아 갑자기 확 떨어지고 축 늘어져 있었던 적이 있어서 더 예민해졌던 거다. 그  며칠 동안 내 마음은 정말 ...아들에게 큰일 난 줄 알고(병원에서도 심각하게 얘기해서 더 가슴이 철렁했다.) 얼마나 힘든 날들을 보냈는데, 우리 집 누가 옆에서 나보고 애들을 왜 방치하고  있냐, 집에서 도대체 뭐 하고 있냐고, 애들 뒷바라지를  어떻게 하고 있냐는 말을 해서 기가 막혔었는데, 걸핏하면 아이들 신변에 안 좋은 일만 생기면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는 식으로 몰아가서 어이없기만 한데.


안 맞아, 생각할수록, 살아 볼수록 안 맞아.

저건 침착한 게 아니라 아무 감정이 없는 거 아닌가?

보통의 부모라면 다들 놀라지 않았을까?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일과 아무 일을 가르는 기준이 서로 다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 건강에 관한 일은 조금 유난을 떨어도, 호들갑을 떨어도 좀 괜찮지 않을까.

무관심한 것보다는 그 편이 오히려 낫다는 나와 거의 모든 일에 '별 것도 아닌 일'이라고 단정 지어버리는 누구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부딪치기 일쑤다.


서로 자기 말만 하고 있으니 애먼 새우가 고생이 많다.

그래도 새우를 먼저 생각하자.

가운데에 있는 새우의 신변 변화에도 관심을 좀 가지고 말이다.

입덧이라고 알아?

해봤어야 알지

본능이야,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나도 모르게 구역질이 난다고.

그런 거야, 비슷한 거.

내 의지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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