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백 년 전에 내가 승진했을 때 새 발령지로 그 양반이 내게 보내 준 허술하기 짝이 없(어보이)는 화분도 5만 원씩이나 했다는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던 과거는 이제 다 잊었다.
"팀장님은 그래도 아무 거나 할 수 없잖아."
"적당한 걸로 하면 되지. 누가 뭘 보낸 지도 모를 텐데. 그리고 솔직히 화분은 관리 안되면 죽고 버려지고 그러는데 너무 아깝더라. 처음 며칠만 그럴듯하고 나중에 보면 다 밖에 나와서 죽어가더라."
"그래도 그냥 넘어가긴 그렇잖아."
그 양반은 과연 화분을 보내려는 것인가,
금분을 보내려는 것인가?
항상 그렇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뭔가를 해야 하는 건 아닌가, 같이 일한 정이 있는데, 함께 한 시간이 있는데, 모른 척하고 넘어가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눈 한번 질끈 감아버리는 게 가장 어렵다.
사람이, 또 그게 그게 아니잖은가?
그냥 안 주고 안 받기, 그게 최고 같은데 정작 당사자들은 그게 말처럼 쉬울 수가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마음이 더 가는 직원이 있으면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니까.
"팀장이든 그냥 직원이든 할 거면 비슷한 걸로 해야 하지 않을까? 그냥 형편에 맞게 하면 되는 거지. 우리 외벌이인 거 다 아는데(이럴 땐 외벌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사용하기 좋다.) 거창한 거 바라지도 않을 거야. 마음이 중요한 거지, 겉치레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런 의미에서 집에 화분도 많은데 내가 싸게 해 준다니까? 내가 직접 배달도 해 줄 수 있어. 다 이고 지고 갈게. 시중 반값으로 말이야. 가뜩이나 집에 화분도 넘쳐나는데, 산세베리아 저것도 꽃집에서 사려면 10만 원은 줘야 할걸, 저렇게 크고 많잖아. 금전수는 어때? 금전수가 있으면 재물운이 있다잖아."
집에 이렇게나 화분이 많은데, 사 왔다고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만큼(이라고 나 혼자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지만) 치장해서 보내 줄 의향도 있는데 그 양반은 시큰둥하기만 하다.
다른 건 못해도 '화테크', 화분으로 어떻게 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고 얼토당토않은 자신감이 스멀스멀 생겨난다고 착각하는 중이다.)
어쩔 수 없다, 그 직장인이 몇 년 후 승진하면 그 사무실에나 잔뜩 보내든지 해야겠다.(고 나 혼자만 또 굳게 다짐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 일급비밀이 그 직장인에게 새어 나가는 날에는 새 근무지에 발도 못 들이도록 제지당할 게 불 보듯 뻔하긴 하지만 말이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발령 선물.
승진을 축하하고 발령 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뭔가 주고는 싶고, 안 주고 넘어가자니 서운하고, 대체 뭘 해줘야 한담? 자칫 전 직원 인기도(?) 자랑 대회 같이도 보이는 그 요망한 것.
이런 것까지 고민하고 살아야 하는 직장인은 참 피곤하겠어.
화분 얘기하니까 갑자기 생각이 난다.
그 양반이 올해 발령받고 사무실로 받은 화분이 하나 있다고 했는데,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잊지 말고 집으로 챙겨 오라고 했는데, 분명히 관리도 안되고 시들어가고 있을 텐데(지난 근무지에서도 발령 선물로 받은 화분이 몇 개 들어왔는데 한 오백 년 전에 다들 요단강을 건너가셨다는 비보를 들은 것이 있다, 어쩌면 지금 사무실에 있는 화분도 이미 기원전 3,000년 경에 요단강을 건넜을지도 모르는데) 진작에 집으로 좀 가져오라니까 하여튼 내 말만 안 듣는 양반이시다.
보내 준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잘 키워야지, 순간 기분만 내라고 보내 준 것이 아닌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