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Jan 06. 2024

오오, 나는 당신께 염색 샴푸를 원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들이시나

2024. 1. 3.

< 사진 임자 = 글임자 >


"혹시 나 몰래 보따리 장사 해?"

"무슨 말이야?"

"뭘 그렇게 많이 사는 거야?"

"그거 얼마 안돼."


심증도 있고, 물증도 있다.

이 양반이 기어코 '겸직 금지의 의무'를 어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보험 파는 일도 지레 겁먹고 못하겠다고 결혼한 지 일주일 만에 우체국을 그만두더니 이제 와서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니는 거람?


"얘들아, 아빠가 우리 몰래 무슨 장사하고 있는 거 아닐까? 이번엔 샴푸 장사인가 보다."

"아빠가 또 뭐 샀어?"

"이번엔 샴푸야. 그것도 8개씩이나."

"뭐? 그렇게 많이?"

"어휴, 다 어디다 놓고 쓰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 양반은 그날 회식이라고 아직 집에 도착도 안 했는데, 그 양반의 분신인 샴푸가 집에 먼저 도착했다, 그것도 8개씩이나.


세상에는 보고도 믿기 힘들지만,

설마 설마 했는데,

많이 사면 무조건 싸다고 마구마구 사버리는 남편이 있다고 한다.

원 플러스 원도 아니고

자그마치 8개씩이나 사 버리다니!

"우린 이제 외벌이야."

라는 말을 내가 일을 그만 둔 순간부터  질리도록 내게 하는 사람이, 날마다 여유가 없다고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 도대체  왜 저렇게 '마구' 사들이는 걸까? 게다가 나는 원하지 않는다는데, 사고 싶으면 그냥 본인 몫만 사면 될 텐데, 내 생각은 꿈에서라도 안해주기를 바라 마지 않는데 도대체 왜?

결정적으로 한번  써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텐데 무작정 저질러버리다니. 무조건 많이사면 싼 거라고(내가 보기엔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처음부터 많이, 대용량을 사놓고 안쓰고 방치한 전과가 어디 한 두 번이더냐.

내가 괜히 그러는 게 아닌데. 몇 년 전 탈모 샴푸도 베란다에 방치돼 있다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내 말엔 콧방귀도 안뀌는 양반. 공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왜 자꾸 물건을 쟁여놓으려고만 하는 걸까.

"솔직히 말해봐, 나 몰래 보따리 장사 하고 있지?"

"무슨 소리야?"

"뭘 저렇게 많이 샀어? 설 명절에 직원들한테 하나씩 돌릴 거야?"

"당신도 쓰고 하라고 샀지."

"난 안 써도 된다니까!"

"난 당신 생각해서 더 샀지."

"제발! 내 생각 좀 하지 말라니까. 나는 없다고 생각해 그냥, 제발!!!"

"당신도 흰머리 있잖아. 그걸로 머리 감으면 감으면서 염색이 된대. 좋지?"

"아니, 하나도 안 좋아. 난 됐다고."

"내가 많이 샀으니까 한번 써 봐."

"난 흰머리 있어도 상관 안 한다니까, 괜찮다고!"

"그래도 흰머리가 있으면 더 나이 들어 보이고 그러잖아. 머리만 까매도 더 젊어 보이는데."

"나이 드는 걸 어쩌겠어. 나이가 드니까 흰머리도 생기는 거지. 지극히 정상적인 노화의 과정이라고. 굳이 염색 안 해도 된다고."

"그래도 애들 생각해서라도 염색도 하고 그래야지."

"무슨 애들 생각을 해서 염색을 하라는 거야?"

아무 상관없는 아이들까지 들먹였다.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얘들아, 너희들 엄마가 흰머리 나서 싫어?"

"아니."

남매는 둘 다 나의 흰머리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데 왜 본인만 혼자 난리야? 염색하고 싶으면 혼자나 하지, 혼자 쓸 것만 살 것이지 한꺼번에 뭐 하러 이렇게 많이 사냐고?"

"한꺼번에 사야 싸지."

이 양반이 정말!

진정한 절약이 뭔지도 모르면서.

내 흰머리가 왜 요즘 부쩍 늘어나는지도 모르면서.

하긴 알면 저렇게 샴푸를 8개씩이나 사지도 않았을 테지.


머리가 자꾸 빠진다고 탈모샴푸를 사서 쟁여 놨다가 쓰지도 않아서 내가 꾸역꾸역 썼고(탈모 샴푸는 출산한고 바로, 12년 전에 썼어야 옳다.), 대용량 샴푸를 사는 게 작은 거 여러 개 사는 것보다 싸다고 해서 아들, 손자, 며느리까지 쓰고도 남을 양이 담긴 그 탱크 같은 샴푸를 두 통이나 사더니, 이번엔 염색 샴푸 8 통이다.

그 탱크 샴푸는 정말 가보로 자자손손 물려주고도 남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머리에만 쓰지 않고 얼굴에도 쓰고 손, 발에도 다 쓰고 빨래까지 해도 몇 년을 쓸 수 있을 것만 같다.(고 나만 박박 우기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그 양반은 화수분 샴푸를 사신 것 같다.

일 년 넘게 쓰고 있는데 그 양이 줄어들지 않는 것 같은 느낌적 이 느끔이라니!

이 양반아, 정신 좀 차려라.

정말 아끼는 게 뭔지,

정말 경제적인 게 뭔지,

정말 알뜰한 게 뭔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제발 사고 좀 치지 마!

가만히나 있어 제발!

그리고 내 생각도 제발 부탁인데 그만해.

하지마, 내 생각은.

그게 날 위해 주는 거야...


작가의 이전글 공무원 외벌이란 말에 조용해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